아름다웠던 새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순간

- 때의 중요성, 능동적 발전적 변화, 용기와 결단. 이형기 '낙화'

by 가을에 내리는 눈

젊었을 때에는 뷔페 레스토랑에 자주 갔다. 그때는 소공동 롯데호텔 뷔페가 유명했다. 첫 접시에 내가 담아오는 것은 언제나, 예외 없이 얇게 썬 몇 종류의 햄이었다. 그냥 그 평범한 맛과 식감이 좋았다. 시간이 흐르고 언제부터인가 뷔페 식당에 가지 않는다. 가끔 호텔 조식 때에도 이제는 그 옛날 그렇게 좋아했던 얇은 햄을 먹지 않는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식성의 변화, 달라진 취향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서라거나 뭐 그런 이유는 없다. 그저 이제는 그 햄에서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한다. 부디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를 소망한다.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과 취향은 시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머물기를 바란다. 무서운 일이다, 그것마저 변한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면.


몇 달전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이른 아침 호텔 내 방의 통창 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다. 일부러 큰 창문을 활짝 열고 들을 정도였다. 내가 일어날 무렵에 노래하기 시작하고 날이 저물면 울기를 그치는 것도 신기하고 좋았다. 이곳 사람들은 집집마다 새장을 몇 개씩이나 놓고 그렇게 새의 노랫소리를 즐긴다. 하긴 지금 기억해보니 내 어릴 적 나의 아버지도 집에서 새를 기르셨다. 몸집이 작은 새 카나리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시끄럽다. 우선은 내 변덕스러움이나 싫증 내는 성향의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꼭 그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소음에 시달린 내 감각의 피로함이 그 주된 원인일 것이다. 밤낮 없이 이어지는 요란한 개소리 (진짜 개의 소리), 밤늦은 시각 잠은 자지 않고 떠들어대는 옆방 투숙객들의 소음, 음악을 크게 틀고 자장가 삼아 잠을 자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들,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울려대는 호텔 근처 카페와 길거리 음식점들의 온 동네 울리는 음악소리, 개인 집에서도 맞장구를 치고...


우리나라는 참 조용한 환경이다. 일본은 더 조용하단다. 이곳은 많이 시끄럽다, 아주 많이. 낮에는 그렇다고 해도 밤에도 그렇다. 새벽에도 그렇다. 사람도 그렇고 모토바이크가 그렇고, 개들까지 그렇다. 소음에 둔감한 이곳 사람들이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우리 같으면 당장 아파트 옆 파출소에 전화했을 것이다. 5분 이내로 경찰이 출동할 것이고 이내 소음은 해결될 것이다. 그게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그런 점에서는 세계 최고 선진국이다. 물론 공무원들이나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일반적인 서비스의 수준도 그렇다. 좋은 나라다.


얼마 전까지도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던 새소리가 이제는 그저 소음으로 들린다니?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어제 호스트에게 밤새 개 짖는 소리와 신음 소리 얘기를 했더니 뭔가 앞집에 한 소리 한 모양이다. 이틀째 밤 시간 내내 시끄럽게 들리던 개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그래서 잘 잤다. 아침이 되니 다시 풀어놓은 모양이다. 어제 아침 그리고 낮시간보다 더 시끄럽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정말 이곳 '공안' (경찰서, 여기서는 꽁안이라고 한다)에 신고라도 하고 싶다. 아마 내가 신고하면 웃을 것이다. 그게 뭐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해달라고요? 그냥 그렇거니 하세요. 그런 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긴 어제 호스트와 함께 공안, 경찰서에 갔다왔다. 나쁜 일 때문은 아니다. 어제 아침 산책 길에 숙소 가까운 길바닥에서 지갑을 하나 주웠다. 얼른 집어들었다. 그냥 두면 그 지갑의 운명이 어찌될지 내가 익히 짐작하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와 바로 지갑을 연다. 빈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냥 지퍼만 열었다. 제법 돈이 들어있다. 신분증과 카드 같은 것도 있는 듯했다. 호스트에게 말한다. 호스트는 영어기 되는 큰아들에게 전화를 한다. 경찰서에 가란다. 나는 가기 싫은데 호스트 중년의 아주머니는 나를 데려가려 한다. 짐작은 한다, 아마도 나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호스트도 이미 지갑을 열고 그 안에 상당한 돈이 있음을 보았던 상태다.


결국 함께 경찰서에 간다. 그분 모토바이크 뒤에 타고. 이들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모트바이크 타기이지만 내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잡아도 되겠느냐고 몸 동작으로 물은 뒤 호스트 여성의 양쪽 팔뚝 근처 옷을 살짝 잡는다. 절차는 금방 끝났다. 돈을 다 센다, 그리고 종이에 적는다, 호스트와 경찰이 두 사람 다 서명을 한다.


이 나라에 와서 처음 경찰서에 갔다 왔다, 그렇게. 지갑을 잃어버린 여성은 (경찰서에서 본 신분증에는 3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얼마나 패닉 상태일까? 거의 이곳 한 달치 월급이었다. 큰 돈이다, 이곳에서는 정말.


모토바이크 뒷자리에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게 내게 무슨 긍정적인 시그널이 될까, 그런 허황된 기대를 살짝 한다. 그러면 좋고!


다시 본론으로.


하나, 나의 변심 혹은 취향의 변화. '심멸즉 감분불이' 마음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떠나면 그것이 제 아무리 귀한 감실 (신주단지 같은 것을 모셔놓은 집안에서 아주 조용하고 좋은 위치)이든 아니면 길가 다 허물어져가는 흔한 봉분이든, 이미 마음 떠난 그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 싫어진 것에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저 싫은 것은 싫은 거야. 그냥 하나의 현상인 것이지.' 굳이 이유 원인 설명을 찾지 말라구.


둘, 그것으로 이미 충분해. 멘델스존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엘리야'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주여!" (Es ist genug/It's now enough) 엘리야가 더 이상 고통과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이만하면 자신으로서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당신 곁으로 가게 해 달라고 신에게 간청하는 대목이다. 자신은 원래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물론 그 근본적 결은 전혀 다르지만 아무튼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는 말이다. 내 경우는 화장실 갈 때와 자연의 급한 욕구를 해결한 후의 사람 마음의 변화,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새소리, 충분히 많이 들었다. 나는 이제 다른 그 무엇을 원한다.


셋, 개소리의 유탄을 아름다운 새소리가 맞은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 이런 경우 자주 본다. 너도 싫고 덩달아 쟤도 싫다, 그저 사람이 다 싫다. 그냥 잠시 혼자 있으면 좋겠다. 이유도 모르고 도매금으로 한목에 넘어가는 경우다.


넷, 내가 처한 아니면 나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의 변화다. 급변하는 이 세계, 언제 어느 순간 어떤 것에 대한 욕구와 니즈가 폭증하고 그 반동으로 기존의 어떤 것에 대한 수요와 필요는 급감할지 알 수 없다. 변동성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불안의 시대이고 소모적인 일상이다.


당장 내일의 상황이 어찌될지 쉽게 알 수 없으니 재고를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없다. 순발력의 시대이고 급조의 시대이며 그때그때 사는 하루살이의 삶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섯, 인위적인 것 혹은 부자연스러운 것들에 대한 기피. 새 한 마리가 내 방 발코니에 날아와 고운 노래를 부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 새의 노랫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 여기도 저기도 죄다 새장 속에 갖힌 새들의 노래. 분명 살아있는 새가 내는 자연의 소리임에도 어느 순간부터 나의 귀에는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같이 들린다.


성형수술을 한 모습을 나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다들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척 보면 바로 알게 된다. 바로 그 부자연스러움 때문이다. 5백만 불의 여인 소머즈라면 몰라도 (사실 50년 전의 미화 5백만 달러는 아주 큰 돈이다) 그저 눈 혹은 코, 턱 등 얼굴의 어느 일부분만을 고치는 성형의 경우, 그 부위는 더없이 예쁘게 고쳐졌을지는 몰라도 다른 부위와의 조화에 큰 문제가 생긴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우리 얼굴의 각 부위는 상호간의 조화와 균형을 최고의 목표로 해 황금분할의 비율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리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압구정동의 제 아무리 잘 하는 성형외과 의사가 손을 댄들, 글쎄 우리 유전자의 그리고 신과 자연의 섭리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후천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그 어색함과 부조화가 그 사람의 것으로 자리잡으려면, 참으로 많은 세월이 소요된다. 특히나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익으려면, 그 어색함과 미움의 모습이 포기와 체념을 통해 타협점을 찾기까지는. 굳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우리 몸의 모든 것은, 털 하나까지도 다 부모에게서 받은 귀한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를 말할 필요도 없다.


식당 밥을 오래 먹지는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자연스럽다, 무리수를 둔다, 자극적이고 늘 튀려고만 한다. 결국 우리 몸이 거부의 의사표시를 한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경우가 많다.


오늘의 시를 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가야 할 때/사라져야 할 때/이제는 그만 내려와야 할 때/모든 것 내려놓아야 할 그때,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 우리 모두 안다. 하긴 그래서 시인도 분연히 그리 하는 사람의 그 쓸쓸한 뒷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알면서/알기에/미련 속에서도 아쉬움 가득 그럼에도 가야 함을 알기에 그리 가는 사람. 나도 그러면 좋겠다. 그러려고 오래 전부터 이런저런 준비와 노력은 하고 있다. 무던히 많은 세월이 더 흘러 미래 언젠가는 이렇게 '가야 함을 알고 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보다 나은, 다양한 수단이 생겨나면 좋겠다. 그것은 결국 언제까지나 어느 한 개인의 문제 혹은 그의 개인사에 속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 하니 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여전한 나의 슬픈 눈은 시인도 어쩔 수가 없나보다. 누군들 어찌할 수 있겠나? 뭘 어쩌겠나? 그냥 그리 영혼의 슬픔 속에 곱게 가는 수밖에.


낙화, 떨어지는 꽃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라도 있다. 물론 끝까지 버티다가 아주 추하게 지는 꽃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는 동백꽃이 단연 으뜸이다. 쿨하다, 멋지다, 슬쩍 보기에는 그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도 없는 듯 보인다. 그리 그냥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툭 떨어져 버린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 왜 벌써 떨어졌나 싶을 만큼 멀쩡한 상태다. 시든 꽃잎 하나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떨어져야 할 때임을 안 것이다. 단지 조금 일찍 떨어진 것뿐이다. 그녀는 그런 전략을 택한 것이리라. 괜히 추한 모습 보일까, 지금껏 심어놓은 우아함과 고고함, 약간의 도도함에 어떤 흠이나 상처라도 줄까 두려워하며.


그것이 낫다. 한 달 두 달, 아니 6개월 더 있은들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다 오십 보 백 보인 것을? 그 단순하면서도 큰 뜻을 범인들은 모를 뿐이다. 그것이 동백꽃과 다른 많은 꽃들, 우리네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지지불태', 멈추어 설 때를 알고 단박에 멈추어서는 용기와 지혜. 그 옛날 홍설주라는 사람이 말했다는 '지지당설', 멈추어서야 할 곳에서 멈추어 서는 것, 설령 여전히 평탄한 듯 보이는 곳에서도 용기내어 멈추어서는 그 실행력. 결국은 떨어지는 꽃 낙화,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떨어지느냐가 그 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쩌면 아주 작은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는 너무도 크다, 아주 크다.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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