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의 창과 최강 방패 - 그 '모순'을 비껴가는 법

- 여유, 사유와 묵상, 아전인수의 지혜. 오세영 '모순의 흙'

by 가을에 내리는 눈

한때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소피스트들이 득세를 하고 큰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의 그 말 잘하는 기술의 덕이었다. 물론 그들의 폭넓은 지식이 그 바탕이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을 철학자라 부르지 않았다. '소피스트' (sophist), '지혜로운 사람' - 그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부른 사람들, 혹은 남들이 '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부르던 이들을 함께 이르는 말이었다.


그들은 일단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에 그 첫 번째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별의별 수를 다 쓰면서까지 결국에는 이겨내려했다. 그것이 곧 그들의 몸값과 힘을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 주장, 그저 말을 위한 말들도 많이 했다. 이런 이유에서 후일 그들을 궤변론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정말 똑똑하기는 했던가 보다. 말의 귀재, 논리의 귀신들, 상대방의 주장 파고들기의 달인, 오늘날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서 뉴욕의 쟁쟁한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들 같았을 것이다. 몸값 천정부지의.


플라톤이 처음 꺼낸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것,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그 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플라톤이 그랬다. 당연히 소피스트들과는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피스트들 그들은 자신은 이미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 지혜를 큰 돈을 받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았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혜를 돈을 주고 사서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 권력의 획득에 썼다.


'그 무엇이든 뚫는다는 당신의 그 창과 세상 모든 것을 다 막아낸다는 그 방패, 그 둘이 붙으면 그럼 어찌 되는 건가요?' '모순' (矛 세모진 창 모, 盾 방패 순) -


그만 허를 찔려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상인.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어야 했다. 궤변론자로서의 소피스트의 입장에서든, 아니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철학자의 입장에서든.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나, 애초 자신의 창과 방패를 선전할 때 그는 이런 퇴로를 마련해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욕심이, 그리고 성급함이 과감하게, 솔직하게 선수를 치고 들어가 미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는 지혜를 막아버렸다.


"네, 하지만 이 창도 이 방패에 대해서만은 그 한계를 보일 겁니다. 그만큼 이 방패가 센 것이지요. 이 방패 또한 막상 이 창과 맞붙으면 아마 고전할 걸요? 그래서 제가 무적의 창이라 말하는 겁니다."


둘, "둘이 붙는다?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리 된다면? 제 생각에는 창은 방패를 조금 뚫고 들어갈 겁니다. 창 끝도 당연 손상을 입겠지요? 하지만 아무튼 뚫기는 뚫는 겁니다, 끝까지 다는 아니겠지만."


"방패요? 살짝 일부가 뚫릴 겁니다. 그러나 푹 관통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결국 창과 방패, 그 둘의 무승부라고나 할까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진 것도 아닌 그런 상태. 그러니 제가 이 둘이야말로 이 세상 최고, 최강이라 이리 자랑을 하는 것이지요."


셋, "장군님이 이 둘 다를 사세요. 그러면 적어도 이 둘이 서로 맞붙는 불상사는 없을 것 아니겠어요? 장군님은 그냥 천하 무적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좋은 값에 드릴께요 이 참에 다 사세요."


넷, "창이 가급적 방패의 가장 얇은 곳을 노려서 그 각도가 수직이 되게 찌른다면 아마도 이 방패도 끝까지 완전히 뚫릴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방패가 자신의 가장 두꺼운 곳으로 최대한 어슷하게 그런 비스듬한 각도에서 창을 막으면 창도 많이 뚫고 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큼 뚫어야 하는 부분이 깊고 길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실전에서 창과 방패가 각기 어떤 전략을 쓰느냐가 그 승패를 좌우한다 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순간의 욕심이 이런 여유로운 지혜의 대답을 가로막는다. 조급하니까, 당황을 하니까, 허를 찔렸다고 그리 허둥대니까. 그러나 그런 순간에조차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정신줄을 바짝 잡아당기면, 그때 어떤 답을 해야할 지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모순의 늪에서 바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스토리는 논리학적 측면에서의 모순은 아니다. 위에 본 것처럼 그 빠져날 구멍은 여러 곳에 있기 때문이다. 어디 보니까 이런 해석도 있었다.


그 상인이 한 날 한 장소에서 그 창과 방패 얘기를 하지 않고 조금 시차를 두고 했더라면 또 다른 도망갈 구멍이 있었을 것이라고. 재미 있는 발상이었다. '아, 그 후 시간이 흘러서 그 사이 기술의 발전으로 그 창도 막아낼 수 있는 새로운 방패가 만들어졌어요. 그게 바로 이것이지요.'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궤변론자 소피스트들이라면 분명 이런 묘안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현실에서 써먹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값은 더욱 올라갔을 것이고.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보는 위치/그 높이/각도/하루 중 시각/계절의 변화/상황의 변화, 이런 것들을 고려해서 순발력 있게 관점을 달리 취하는 탄력적이고 융통성 있는 해석이 요구된다. 결국은 그것이 경쟁력이다.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이 말은 바로 사고의 전환, 패러임 쉬프트 (paradigm shift)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떤 문제든 애초 그 문제가 발행한 시점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는 결코 풀 수 없다'


때로는 아전인수도 필요하다. 우선은 내 논에 급한 물을 먼저 대는 결단력도 있어야 한다. 그저 남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것은 아니다. 일단 타인이 잽싸게 자신의 논으로 먼저 물길을 돌려버리면, 그제서야 어쩌구 저쩌구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시간에 있어서 빠르면 권리에 있어서 강하다' 이런 고대 법언이 있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라는 말과 조금은 그 뜻이 비슷한 면이 있다.


어쩌면 모순이라는 주장은 그저 원론적인 힘 없는 주장의 다른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마케팅 101' (대학 1학년 학생들 누구나 세부 전공에 상관 없이 그저 가장 쉽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개괄적인 내용의 수업, 개론/101/원오우원 - 기초 과정의, 입문의, 개론의, 초보의, 기본의)이라고나 할까요?


그 모순이라는 주장의 모순을 깰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합니다. 당황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시간을 가지고 두뇌를 회전시키면 우리의 머리는 금새 그 반박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낼 겁니다. 그저 그것을 실행하면 됩니다.


오늘 제 이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금방 곳곳의 헛점을 찾아내고 지적할 논리를 만들어 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냥 너그럽게 읽어 주세요. 너그럽고 선한 마음을 가진 분들의 공간 브런치에, 제가 그저 선한 마음으로 쓴 글일 뿐이니까요.


이제 시를 본다.


오늘의 이 글에 딱 어울리는 멋진 시다. 꼭 두세 번쯤 읽어 보시라.


모순의 흙

- 오세영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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