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독한 샴푸, 그러나 그때는 인기 만점의 그 샴푸

- 결국은 상대성, 아전인수도 필요하다. 주영헌 '특수 상대성 이론'

by 가을에 내리는 눈

짐을 줄이느라 쓰던 샴푸를 넣어올 수 없었다. 새벽에 도착한 나, 당장 머리는 감아야 하겠고 그냥 호텔에 있는 삼푸를 쓴다. 인간은 쉽게 타협한다. 오후에라도 당장 사러갈 줄 알았던 샴푸, 그냥 있는 것을 계속 쓴다. 며칠이 지나자 손의 피부가 좀 이상하다. 지난 세월 맨 손으로 설거지를 해도 멀쩡하던 손이 갑자기 일주일 사이에 심하게 거칠어졌다. 아 샴푸구나! 그러면 두피는? 당장 기존에 쓰던 브랜드의 샴푸를 산다, 그것을 쓴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손은 괜찮아졌다.


어릴 때 처음 나왔던 샴푸의 이름이 기억났다. '유니나' 샴푸다. 윤이 나서 유니나? 어디에 윤이 나나? 머리 감는 샴푸인데? 아 머릿결이 윤이 나게 될 것이라고? 참 마케팅 컨셉하고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서 잠시 썼던 호텔의 샴푸가 아마도 그때 그 시절의 그 샴푸 수준이었으리라. 그래도 처음 나온 것이니까, 그때까지는 머리 감을 때 쓰는 액체 비누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하긴 나름 대기업에서 나온 것인데?


절대적인 기준이나 수준보다는 결국 이전과 혹은 다른 누구와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를 말하는 상대적인 우위가 결국에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많이 거칠고 그래서 피부에 좋지 않은 그런 것이라도 아무튼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니까. 그것으로 되었고 그것이면 족하다, 만족한다. 옆 사람이 쓰는 것보다 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아니 그게 중요하다 사람들에게는. 사물과 사람과 환경을 보는 방식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좋으면 된 것이다. 남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시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샴푸 대신에 외제 '레브롱' 샴푸를 썼다. 훨씬 부드럽고 특히 향이 좋았다. 두 제품을 비교해 보고 나면 다른 하나는 다시는 못쓰게 된다. 상대적인 비교, 상대적 우위의 무서움이다. 좁은 집에 살다가 넓은 집에는 살아도 거꾸로 넓은 집에 살다가 좁은 집에서 살기는 많이 힘들다 하지 않는가? 어떤 배경과 상황에서 나온 얘기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무튼 나 어릴 때 어머니가 내게 자주 하신 말씀이다. 살아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뭐 내 마음대로 되나? 그리 살아야 하면 사는 것이지?


산책을 하다가 그리고 문득 무언가를 보며 머릿속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으면 즉시 적어놓는다. 잊어먹기 전에. '둔필승총' (그때그때 무언가를 적는 것이 마치 둔해서, 머리가 좋지않아서 그런 것 같지만 결국은 총명하다고 뻐기는 그 기억력에의 의존을 이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늘 강조하시던 말이다. 정말 그랬다. 기록하는 습관이 그렇게 생겼다. 지나간 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메커니즘, 나쁘지 않다.


오늘의 이 글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시와 함께 하는 에세이', 내 브런치 플랫폼 모든 글의 큰 주제가 이것이다. 내 생각의 단상을 다른 사람의 시와 함께 엮어낸다. 시도 읽고 나라는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묵상의 결과도 공유하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글을 쓴다. 인기는 별로 없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그 제목이 아주 거창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상대성 이론 보다는 '상대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특수 상대론은 관측자가 정지해 있거나 등속 운동을 할 때의 얘기다. 가속 운동을 한다면 일반 상대론으로 넘어간다. 그건 주로 중력에 관한 얘기다. 아무튼 특수 상대론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동시성의 상대성'이다. 어떤 두 사건의 동시성 여부는 상대적으로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동일한 두 사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것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시차를 두고 다르게 일어난 것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 얘기에서 많은 묵상의 단초를 얻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의 원리'다. 질량이 에너지로, 혹은 에너지가 질량으로 바뀔 수 있다는, 훗날 원자폭탄 제조의 출발점이 된 그 무서운 이론. E = mc 제곱 (에너지의 총량은 질량의 변화에다가 상수 <초당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도는 그 빠른 빛의 속도, 초당 30만 킬로미터, 그것도 진공 상태에서의, 그것을 제곱한 값. 그러니 얼마나 큰 값인가?>를 곱한 값이다).


이 말 또한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 중 특히 이 두 가지 이론은 여러 날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지금도 나의 일상에서 많은 역할과 작용을 한다.


내 근심과 두려움을 조금만 줄여도, 그 줄어든 질량은 태양 상수와 곱해져서 어마무시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내게 다양한 방식으로 유용한 쓰임새를 가질 긍정의 에너지를.


내가 남녀간의 사랑에 낭비하는 그 시간과 열정을 아주 조금 줄이면, 그것 역시 엄청난 크기의 빛의 속도 제곱의 상수와 결합되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그런 힘, 생산적 에너지를 내게 줄 수 있다 뭐 이런 식의. 내가 일면식도 없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가끔 감사의 마음을 갖는 이유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여전히 물리학 이런 쪽에는 문외한이다.


이제 시를 본다.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상태의 나무, '삶과 죽음의 그늘이 함께 자란다'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육십 년 이상의 긴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야 자신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노인, 굳어버린 왼발을 정성껏 돕는 고마운 오른발. 왼발 또한 오른발의 그 진심을 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낸다. 서로의 등이 되어주는 관계, 하나의 생이 또 다른 생을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그런 아름다운 공존.


이런저런 이유나 사정으로 잘려나간 나무의 밑동에서도 새 줄기는 돋아난다. 시인은 그렇게 따쓰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읽는 나도 힘이 난다. 지난 세월 아이를 잡아주던 그 손으로 이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아이처럼 걷고 있다. 우리네 삶 속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시인은 그리 말하고 있다.


동시성의 상대성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일까? 느려지는 시간 ('시간 지연')을 말함인가? 짧아지는 거리 ('길이 수축')를 암시하고 있는 걸까? 힘없어 보이는 노년, 하지만 어쩌면 지혜와 여유의 힘은, 그 운동량은 오히려 더 큰 값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항변하는 것일까 ('상대론적 운동량')?


아니면 여기저기서 불필요한 무게를 좀 줄여서, 이를테면 통상 나이 들면 자꾸만 나오는 배도 (고맙게도 저는 아직 배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시 집어넣고 여전히 남아있는 욕심의 크기도 줄이고, 미련과 아쉬움도 줄이고 무엇보다 이제는 두려움을 줄여서 그 질량을 엄청난 긍정적 생산적 활력 에너지로 바꾸시라 그리 강변하고 있는 것일까? 시인이 말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특수 상대성 이론

- 주영헌

저 나무,

죽었는지 알았더니 새순이 돋고 잎사귀가 핀다.

반은 죽었지만, 반은 살았다.

삶과 죽음의 그늘이 함께 자란다.


노인,

낡은 보행기를 끌고 간다.

육십갑자 하고도 한참을 더 감아야 되돌아갈 수 있는 어린 날

보행의 초심을 기억하려는 듯

조심조심 발을 떼고 있다.

굳어버린 왼쪽 발은

함께 보행하던 오른발의 진심을 되짚으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공존이란

삶과 죽음이 서로의 등이 되어주는 일

생이 또 다른 생의 배후로

후생(後生)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지해 주는 일


잘려나간 밑동에서 새 줄기 돋아난다.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다.

생(生)의

특수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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