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심? 억울함? 또 하나의 조삼모사? 빅토르 위고 '삶 속의 죽음'
'불생불멸' (애초 생겨나지 않았다면 사라지는 것 또한 없었을 것이다), 노자 장자의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이 말을 살짝 뒤집어 보면 생겨난 그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그 생겨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뭐 그런 말이 되지요.
너무 야박한가요? 아니요, 이치가 그렇고 사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요.
다이아몬드는 왜 그리 비싼가요? 송로 버섯 (트러플), 금은 보석은요? 이유는 단 하나, 그 희소성 때문이지요? 흔하지 않으니까요, 어디에나 그냥 널려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혹시 우리네 삶이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었다면, 글쎄요 좋은 점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나쁜 점이, 걱정되는 점이 훨씬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우리의 삶도 그 끝이 있기에, 그 끝 있음을 우리 모두 알기에 그래서 더욱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되었다 저는 그리 믿습니다.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끝나는 것을 좋아하세요? 또 다른 물음 하나 - 시작이 좋은 것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끝이 좋은 것을 좋아하나요?
정답요? "당연 그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의 답은 달라진다. 물론 그때의 나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다." 저는 이런 대답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너무 계산적이잖아요? 뻔한 답이구요. 도무지 진실된 그 무엇이 느껴지지 않아요! '잇 디펜즈 (It depends, 뭐 그저 그때그때의 내 사정에 따라)'. 뻔한 것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맛있는 것은 맨 나중에 먹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붕어빵도 팥이 제일 많은 부분을 가장 나중에 먹어요. 저는 끝이, 그 마무리가 좋은 것이 좋더라구요? 어머니가 늘 그러셨어요. 작은 집에 살다가 큰집에는 살아도 큰집에 살다가 작은 집에는 못 산다고. 무슨 말씀인지 살면서 이해가 되었어요.
고진감래가 좋지 그 역인 '감진고래' (달콤함이 다하면 그때는 바로 쓴 것들이 들이닥친다)는? 어휴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살짝 그 결이 다른 말에 이런 서양의 격언이 있지요 - '즐거움 뒤에는 늘 고통의 순간이 이어진다 (Pleasure always followed by pain)'. 지금의 기쁨과 즐거움, 결코 공짜 아니라는 경고이고 그러니 후반전 잘 준비하라는 실무적 충고이지요. 그렇게 보면 지금의 즐거움과 기쁨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조금은 맥빠지는 인식이 뒤따르지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잖아요? 꼭 '호사다마'를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예전에 제 다른 글에서 '조삼모사 조사모삼'이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어요. 의외로 관심을 많이 보여주셨지요. 차라리 그 이슈는 쉽고 평이하다 생각해요. 그 경우 결국 총량은 같으니까요, 어쩌면 그저 사소한 전술상의 변화일 뿐.
그런데 오늘의 주제 '시작 혹은 끝'은 좀 난해합니다. 제게는 그래요. 욕심이 생기고 아쉬움이 생기고,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지고만 싶고. 이러자니 저것이 울고 저렇게 하자니 또 이 놈이 울고. 그러나 결국 우리네 인생은 순간순간의 선택의 총합인 것을! 그러니 선택이라는 것을 하기는 해야 하겠지요?
조금 전 아침 산책의 말미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태어나서 5-7세까지의 영아기/유아기의 그 시간들이 좋을까 아니면 무려 6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인생의 후반부 7년이 그나마 더 나을까?
앞으로 최소 60년은 손에 쥐었다 생각하면 여유와 기대감 속에 기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7년의 '첫 출발의 시기'는 뭐 별로 느끼고 사유하고, 상미하는 것들도 거의 없을 것이니 그것이 문제 혹은 아쉬움이 되겠지요? 아니면 오히려 그래서 그저 속 편하고 좋은 것일까요?
후자를 보면, 이제는 거의 끝에 가까웠다는 인식이 글쎄요 불안과 아쉬움으로만 작용할까요, 아니면 이제야 좀 쉬는구나 이런 안도감 또는 성취감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전자에서의 앞으로 내게 올 그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만큼이나, 후자의 지금껏 자신이 이루고/맛보고/즐기고/손에 쥐었던 그 많은 것들에 대한 흐뭇함과 추억도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유한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시작이 되었으니 이제 그 끝이 오겠구나 이리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 과정이겠지요? 한편 이제 끝이 났으니 시작이라는 놈이 내게도 오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논리와 사유의 전개일 것이구요.
그렇다면 결국에는 또 다른 형태의 조삼모사 조사모삼 게임인가? 이러나저러나 총량은 동일하다고? 그런가 과연? 그렇다면 굳이 '아이고 크게 손해 보았구먼!' 이런 후회와 아쉬움의 위험은 적겠네요?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저는. 수학박사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누군가가 수학적으로 이것을 증명해준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어느 작은 나라가 이웃한 큰 나라에 정복되었어요. 그 작은 나라는 이제 속국이 되어 큰 나라에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바쳐야 했어요. 전국의 예쁜 젊은 여성들 중에서 여러 명이 강제로 선택되었지요. 그중에 아주 먼 시골 출신의 처녀가 있었어요. 그 집은 초상이 났겠지요?
그 처자도 몇 날 며칠을 울고, 가족 모두 크게 상심하고 슬퍼했지요. 드디어 큰 나라의 황궁에 도착했어요. 그때도 여전히 그 젊은 여성은 눈물 속에 지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황제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어요. 그 후 얼마가 지나 그 처자가 자기 부모에게 이리 말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리도 좋은 세상이 있는 줄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제가 사는 집이며, 제가 그냥 고향에 있었다면 평생 구경도 하지 못했겠지요? 제가 왜 그리 울고 불고 했나, 지금 생각하면 그냥 헛웃음이 나와요."
그런 삶이 좋다고, 부럽기까지 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왕왕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을 두고 그저 상상 속에서, 자기 선입견 대로 그렇게 단정하고 결론 내어 버립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막연함이 가져오는 불편함, 현재에 안주하려는 관성, 이런 것들 때문이지요.
그러니 일단 한번 그 끝의 세계에 가보자, 그리 말씀 드리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 삶의 끝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조금은 더 지혜롭게 대응하자 그런 취지의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유비무환, 그 말은 삶의 끝에 대한 경우에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준비하면 많이 달라집니다. 시인 박노해님이 어떤 책에서 이런 얘기를 했지요. '삶의 반대되는 말은 죽음이 아니다. 삶의 반대는 충분히 살지 않는 것이다'
오해는 마세요, 그분은 영어로 'fully'라는 표현을 일부러 쓰셨는데, 완전히/최선을 다해서/열심히/후회나 미련 없이,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싶어요. 살 수 있는 때까지 최대한 끝까지, 그런 시간적 개념에서의 충분히는 분명 아닙니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이 더 소중합니다. 아끼고 어여삐 여기며 살게 되지요. 지금 내게 주어진 것, 내가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것임을 알게 되지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가급적 즐겁게 '충분히' 삽니다. 그러니 언젠가 그 끝이 와도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삶의 반대로서의 그것'은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충분히 살아낸 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의 시를 봅니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에 대한 이 양반의 사유와 묵상은 참으로 깊고 묵직합니다. 시 한 편이 두꺼운 책 한 권과 맞먹습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분의 시, 그의 소설 그리고 이 위대한 인물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삶 속의 죽음 (DEATH, IN LIFE)
- 빅토르 위고
우리는 그저 지나갈 뿐이다 - 이 죽음의 잠들을
짙은 녹색 잎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거대한 죽음의 신이 갈아놓은
그 많은 고랑들에 허리 숙이는 그림자 아래로 그렇게,
한없이 부드러운 여름 바람은 소용돌이 치는 물결처럼 여러 차례 불어온다
죽은 자들은 그저 무덤에 자리를 잡는다
산 자들은 한숨 짓는다 : 하지만 이미 잊혀진 사람들,
머지않아 그들에 대한 당신의 기억들도 그렇게 사라진다.
당신은 더 이상 무덤가 산새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아니 죽은 자를 기억하려 모여든 도심 속 사람들의 그 번잡함에도
끼지 않으려 할 것이다.
당신은 오히려 무덤의 고요 그 한 가운데에서 우울하게 어둠 속에 지낼 것이다.
그러면 그때 죽은 자는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 신이 우리에게 그의 삶을 주었다고.
그런가?
당신은 죽는다, 당신들의 그 열매 맺지 못한 삶들은 이제는 눈물로 경작되고 있다,
그저 명예와 영광을 위해 당신들은 산 자들의 두려움으로 한껏 차려 입는다.
오, 불쌍한 산 자들이여! 오, 그대들 속세적 그림자들이여!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산다 ; 하지만 당신들의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 또한
결국에는 어두운 빛을 드리울 것이고 그렇게 사라진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문 번역본을 바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