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한 번이니 최선을 다해서. 나는 객? 정연복 '손님의 노래'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를 많이 좋아한다. 142센티의 작은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무런 미련이나 아쉬움 없이 그저 시원하게 뱉어내는 듯한 그 독특한 창법. 오랜 시간 길거리 가수로 노래하며 얻게 된 그녀만의 창법이라고 한다. 그녀의 또 다른 노래 중에 '장밋빛 인생 (라 비 엉 호우즈, la vie en rose)'이 있다.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꼭 생수를 사 먹어야 한다. 그 생수를 다시 끓여서 먹는 사람도 있다. 하긴 의사 친구 녀석도 내가 속에 탈이 난 경우 원격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생수도 꼭 끓여서 먹으라고 조언한다. 내가 마시는 브랜드는 네슬레의 '라 비 (la Vie, the life)'라는 이름의 생수다. 모르고 지내다가 어제 문득 '아니 내가 지금 마시는 이 물의 이름이 인생? 이거 너무 거하고 심각한 것 아니야? 내가 매일 인생을 나의 입으로, 내 몸으로 마시고 있다고? 무려 인생을?'
한국에서는 '퓨어 라이프'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말이 된다, 인생이 아니라 생명/우리 일상의 삶. 그러니까 이를테면 감로수인 셈이다, 생명의 물. 순수한, 깨끗한 삶을 위한 물. 이곳 사람들도 아마 생명의 물, 일상 속의 맑은 물 그런 정도로 새기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여전히 지금 내가 마시는 물을 인생이라는 이름의 생수로 기억할 것이다. 좋지 않나, 매일 인생을 마시고 삶을 생각하고 묵상의 세계에 잠시 함께 빠져들고, 그 생명의 물과 함께?
이 나라는 오랜 기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여전히 생활 곳곳에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아마 불어에도 꽤나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라는 영어보다는, '라 비'라는 불어 정공법을 택한 것 같다. 나는 좋은 마케팅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생수 병의 디자인이나 문구, 글자체, 종이 박스의 디자인까지 마케팅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아주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인가 오늘은 물맛이 훨씬 좋게 느껴진다. 하긴 이것이 마케팅이다, 이것이 관념이고 인식의 세계다. 어디 생수만 그렇겠는가?
'인생 (human life)', 말 그대로 사람의 삶의 전 과정이다. 태어나는 것이 그 시작이고 죽는 것이 그 끝이다. 그저 그것이다 (댓츠잇 - That's it)! '축생 (animal life)'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때로는 이렇게 그냥 단순하게 우리네 인간의 삶, 인생을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삶이 이리 복잡하고 힘든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것에 애초부터 너무 많은 의미와 가치를 두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그 부담감이 늘 우리를 짓누른다. 삶은 고해라고 어려서부터 듣는다, 아예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보니 자주 우리를 잡아먹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들 인간의 삶에 허덕이고 치이고, 늘 아등바등 그리 살다가 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때에 누가 우리에게 어떤 사명과 과제를 주었나? '네가 지상에서 꼭/반드시/기필코 이루어야 하는 미션은 이것이다' 그런 것을 받은 사람이 있나? 그저 나 혼자 달떠서 내가 지어내고 내가 나에게 짐 지우고, 그렇게 나를 닦달하고 몰아가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가장 무서운 원인일 것이다. 많은 비난은 그래서 '끊임없는 비교/나의 주관적 판단/시기와 질투'에게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것은 누가 하는가? 바로 내가, 나 혼자서! 논리적 귀결로만 보더라도, 그러니 모든 욕은 누가 먹어야 하나? 바로 내가! 나 혼자의 독박!
대중가요 가사 중에 '인생은 미완성'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완성은 애초 이루어야 할, 달성해야 할 명확한 할당량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미완성. 그것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고 누가 언제 그 무게를 달고 질을 평가하고, 그래서 최종 판단과 판결 (버딕트, verdict)을 내리나? '쓰다가 마는 편지'도 아니다. 마는 것은 내가 도중에 뭔가 다른 생각이 들어서 나의 의지에 따라 그만 두는 것이다. 그저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하다가 언젠가 그것들을 할 수 없는 때가 오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쓰다가 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이 미완성의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분명 시작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끝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 (인생)'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쓸 만큼, 쓸 수 있는 만큼은 나름 열심히 쓴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슈퍼컴퓨터가 그 모든 사람들의 일생을 분석하고 그 무게를 달고, 그렇게 정성적/정량적 (가중치까지 부여해서) 비교하기를 할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고, 할 의미나 가치도 없다.
그저 그의 삶은 그의 것, 나의 삶 역시 오롯이 나의 것. 그것에 대한 판단 역시 전적으로 나의 몫이고 나의 독점적, 절대적 권한에 속한다. 다른 글에서 나는 '나는 지금 나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가 나를 배려해야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려도, 아니 그래서 더욱 더 나는 내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진정 나의 편인 나다. '너그러움과 선함, 세상을 보는 창/따뜻함과 긍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창',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문구를 내 일상 속의 경구로 삼고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다른 분들에게 충고하고 조언하고, 개똥철학 늘어놓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 아님을! '아는 것 하나, 실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이 말의 무서운 경고를 나는 늘 기억한다.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다. 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뭐 다른 분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늘어놓겠나? 우선은 나를 위한 다짐이라 그리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브런치의 독자분들이 보고 듣고 읽는 그 현장에서 내가 한 말이니, 그 무게와 책임감 또한 그만큼 클 것이라는 나의 마케팅적 전략도 숨어있다는 것도 알아주시기를!
브런치 다른 작가님들의 좋은 글들을 보면서 내가 얻는 것들이 참 많다. 나의 글쓰는 행위 또한 '일종의 품앗이'라고 받아들여 주시면 더욱 기쁘겠다. 실제로 그렇다. 날름날름 곶감 빼 먹듯 받아만 먹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명품 반건시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름 먹을 만한 그런 나의 노력, 그것이면 나는 족하다!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늘 조곤조곤 설득력 있는 시를 쓰시는 신에 대한 믿음 깊은 정연복 시인의 시다. 오늘도 그렇게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듯 말한다. 그래서 공감이 간다. 그러나 험한 세상에, 주인인 이 세상에 불만도 있다. 시인은 그러지 말라고 하시지만 나는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큰 집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작은 손님이란다. 주인이 아니라 그저 객이란다. 그러니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불평하지도 말고 슬퍼할 일도 아니라고. 따스한 햇살이면 햇살, 그리고 찬이슬 비바람 아무 말없이 그냥 꿋꿋하게 온몸으로 맞아내는 꽃처럼 그리 받을 지니. 세상이 내어주면 주는 대로 그저 고마워하면서 그렇게 잠시 있다가 떠나면 그뿐. 설사 많이 서운한 게 있더라도 무릇 손님은 주인 앞에서 다소곳해야 한다고 시인은 우리를 그리 일깨운다.
그래도 어떤 때는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그리 서운한 마음 가득할 때가 있는 걸? 그런 경우에도 아무 소리 말고 그저 잠시 있다가 손님처럼 그리 가라고? 하지만 주인이 그리 홀대하면 다시 오지는 않겠구먼 이 세상? 하긴 나도 굳이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어차피 애초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왔으니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 가려고 했을 뿐. 그런데 살아보니 두 번 살 곳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나는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