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인이 되는 나의 삶, 그리고 그 끝도. 장옥관 '흐린 날은'
'왜 그 깊은 벽산에 사느냐고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저 웃으며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편안하기만 하다
복숭아꽃 물을 따라 흘러 그 간 곳을 알 수 없으니
인간 세상 아닌 것 같은 별천지가 여기 있구나'
이백의 '산중문답'이라는 시다. 이백은 젊은 시절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 깊고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 중국의 호북성 안륙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하고많은 곳을 두고 왜 지금 '하필 그곳에'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일 뿐이다. 삶의 이유나 목적 뭐 이런 걸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장소의 이슈가 아니라 '지금 왜,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훅 하고 들어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그러나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그런 '선문선답'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도 답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질문을 왜 해?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것이지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 다들 그런 것 아니야?' 이런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저는 평소 이 부분에 대해 자주, 아주 많이 생각해 온 사람이라 나름의 대답을 드릴 수는 있지요. 진지하게 물으시는 거라면!
하나, 제 나름 정해놓은 시간표가 있기에 그것에 따라 지금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제 첫 번째 대답입니다. 제 자신에게는 지극히 명쾌하고 간단한 이유가 되지요. '그러기로 했잖아? 지금은 살아야 하는 시간이야. 그러니 최대한 충실하게 살아가야지?'
둘, 다른 특별한 대답은 쉽게 머릿속에서 꺼내지 못하겠네요. 그럼 그렇게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 사니, 그래서 작금의 삶이 뭐가 좋아요?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주나요? 이건 좀 대답하기 쉽습니다. 우선 사랑하는 아들과의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팀즈' (스카이프의 후신) 영상 대화가 저를 즐겁게 하지요. 그 녀석의 그 활기찬 모습, 회사 생활 이야기, 이 아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나의 일상에 대한 깊은 관심, 약간의 걱정 뭐 이런 것들.
그래서 지금도 브런치에 글을 쓰잖아요? 누군가가 새롭게 구독을 해주면 신나고, 글 좋았다 짧게 그러나 마음 가득 담아 댓글을 주시면 더욱 기분 좋고 나도 이내 답글을 보내고. 요즘의 제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으니 그 또한 좋은 일이고.
지금도 열어놓은 통창문을 통해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명랑한 노랫소리를 즐기고. 이곳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처럼 예쁘게 노래하는 새를 집에서 기르는 취미가 많습니다. 새를 잡으러 다니는 전문 새잡이들도 많구요. 잡혀온 새장 안의 새들에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쩌겠어요? 그것도 다 그들의 팔자인 것을? 애초 노래를 잘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요?
한창 제철인 망고도 먹고, 올리브 오일에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 충분히 익혀 껍질을 벗겨내고, 계란 두 개를 넣어 만든 묽은 스크램블도 매일 점심에 즐기고. 가끔은 드라이 레드 와인도 마시고. 아침 저녁 한가롭게 동네 산책을 하고. 뭐 많고도 많아요.
이런 답은 기대하지 마세요. 첫째, '아 젊은 시절 죽자 하고 일만 했으니 이제는 좀 즐기면서 살려구요. 그래서 사는 것이지요?' 돈이 듭니다, 충분한 금전적 여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얘기입니다.
둘째,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여전히 커요. 모르잖아요, 저의 내일이 당장 어떨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러니 사는 날까지 살아봐야지요?' 그만큼 사셨으면 남은 시간의 궤적들이 어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추세의 법칙, 일관성의 법칙, 관성의 법칙!
셋, '아니 이 좋은 세상 그럼 살지 죽어요? 아깝잖아요, 자연이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나를 급하게 데려간다고 해도 억울하고 아쉬울 판에, 자연이 허락한 삶 악착같이 살아야지요? 당신은 안 그래요?' 그래서 뭐 하시게요? 그런 악착같음, 글쎄요 과연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요?
넷, '이제라도 이 세상에 뭐 제가 왔다간 흔적을 좀 남기고 싶어서요. 봉사라든지 그런 형태로요.' 저는 아쉽게도 그런 선하고 의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라서 감히 그런 큰 뜻은 없답니다.
다섯, '손주 보는 즐거움의 그날을 기다리며 살지요. 얼마나 예쁘고 귀하겠어요? 자식의 자식은 자식과는 또 다른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잖아요? 기다려야지요 곧 올 그날을!' 기대난망, 아직은 제게는 아쉽게도!
여섯, '혹시 알아요 인생 2막 누군가 좋은 새로운 사람을 동무로 만나게 될지? 그거 모르는 겁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그래서 오늘도 운동 열심히 하면서 외모도 여전히 신경 쓰면서 그리 살고 있지요?' 그렇지요,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충분히 나이 든 지금, 현실적으로 그런 가능성의 확률은 아주 작답니다!
일곱, '내가 벌어놓은 것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쓰고 가려구요. 그거 남겨서 뭘 해요? 다 소용없어요, 그저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최고지. 그러니 다 쓰는 날까지는 살아야지요.' 저는 이 생각, 동의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자식이잖아요? 안 그래요?
사람 일이야 그 누구도, 당장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지만 글쎄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자연이 나를 데려갈 그날까지 그냥 무작정 그리 산다고? 언제까지? 자연은 언제 어떻게 나를 데려갈 것인데? 물어볼 수도 없고. 너무 답답한 것 아니야? 그저 그의 처분에만 맡겨? 그러고는 그날까지는 주야장천 그렇게 사는거야? 그래도 내가 '포유 강 영장 목' 인간에 속하는 사람인데?
제가 오늘 글의 제목으로 제시한 이런 질문을 하고 하지 않고가 우리네 삶에 당장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이런 제목으로 묵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나의 지금을 한번 돌아보고 점검해 보고, 그렇게 앞으로 내게 올 날들을 조금은 다르게, 조금은 더 발전한 자세로 그리 열심히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면? 좋잖아요?
오늘 이 글의 취지는 그런 것이다, 이리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이제 오늘의 시를 봅니다. '당신은 왜 사나요?'에 대한 많은 대답들을 품고 있습니다.
멀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사실은 많다, 시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힘들게 허덕거리며 사느라 일상의 작은 것들은 보지 못하는 우리. 흐린 날에는 그런데 잘 보인다. 흐린 날, 내 마음에 잠깐 여유가 생긴 날? 평소와는 달라서 잠시 지금의 나의 삶을 돌아보는 그런 날?
행복했던 지난 날들의 그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은 어느새 다 잊혀져가고? 하지만 흐린 날, 눈까지 감으면 다 보인다,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만지면 그저 작은 흙먼지에 불과할 내일의, 아니 그 언젠가의 내 모습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면 그때는 보인다, 다 보인다. 나의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결국은 내게 올 미래도!
흐린 날은
- 장옥관
멀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의 허기 때문에
몰랐던 안경알에 묻은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행복한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지나친 확신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 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