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지,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행력, 기회. 곽재구 '희망을 위하여'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때 나는 친구와 매일 밤늦게까지 함께 공부했다. 저녁도 늘 함께 먹었다, 도시락으로. 어느 날 저녁 식사시간이 임박해서 그 녀석이 내게 말한다. 오늘은 혼자 먹으라고, 여자 친구가 와서 자기는 나가서 먹을 것이라고. 쿨 한 척했지만 이래저래 서운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소변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아니 뭐가 그리 서운해? 부러워? 아니면 한 끼 혼자 먹는 것이 그리도 쓸쓸했어? 그것도 아니면 왜? 그럼 너라면?"
그날밤 헤어지기 전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잠시라도 머릿속에 넣고 있어서 미안하다고도 말했다. 친구가 말한다 - "아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사실 나도 내내 마음이 찜찜했다. 여자 친구가 맛있는 것이라며 사 준 음식도 별 맛이 없더라 오늘은. 내가 미안하다." 우리는 그렇게 평생 귀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교련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기초 군사훈련이었다. 그런 날은 아예 교련복을 입고 학교로 갔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지하철 안에서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여성을 보았다. 급히 마음을 바꾸어 내가 내릴 곳에서 내리지 않고 그 여성을 따라간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한참을 걸어간다. 멀찍이 뒤따라간다.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어느 아파트에 도착한다. 이제 막 그 여성은 사라질 순간이다. 내가 서둘러 말한다 - "저,"
하지만 미처 뒷말을 이을 여유도 주지 않고 그 여성이 말한다 - "저 결혼한 여자예요!"
나는 그냥 돌아선다. 하긴 무슨 말을 하겠나? 뭐 그렇다고 부끄러운 감정은 없었다. 내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한 젊은 남자가 한 아름다운 여성을 따라간 것 밖에는. 그것도 오늘 이것이 처음이고, 그 여성이 달리 무슨 의사표시를 한 것도 아니고.
집에 와서 혼자 식식거린다 - "아니 그러면 뭐 결혼한 여자라는 표식이라도 하고 다니든가? 내가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은 상태인지 어떻게 알아, 참!"
나는 그때 바로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 '아 네, 그래요?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요!'
살면서 내게 온 기회 혹은 찬스를 놓쳐버린 경우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찌 나만 그렇겠나?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좋은 기회를 번번이 그냥 놓치고 마는 것일까?
하나, 그때는 그것이 내게 좋은 기회인 줄 미처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좋은 기회란 그저 순간에 휙 지나가는 것이니까. 우선 정보 자체도 부족하고, 내 판단과 분석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던 상황도 아닐 것이고.
또 어쩌면 그때의 그 '기회'라는 것이 사실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실제로 그렇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훗날 시간의 흐름이 가져온 착시 혹은 '지나치게 크게 보기'의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 기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놓친 것에 대한 커지는 아쉬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분명 좋은 기회'였을 가능성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경우 시간의 경과에 따른 단순 착시는 아니라는 말을 지금 나는 하고 있는 것이다.
둘, 무엇보다 미적거림의 탓이 크다. 망설임, 우유부단, 선택의 지연. 그 사이 그 기회는 나를 지나가버린다.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른다.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임자, 해봤어?' 모 그룹 왕회장님이 늘 하셨다는 이 말. 지난 세월 내게는 삶의 중요한 경구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내 앞의 돌은 꼭 들춰보자' 이건 나의 말이다. 그 밑에 무엇이 있을지는 그 돌을 들춰보아야 비로소 안다. 그래서 가급적 꼭 들춰보려 노력한다.
셋, 두려움 때문이다. 미적거림, 망설임의 원인은 대부분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비겁의 뜻이 뭐지? 겁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고. 그럼 뭐?'
집에 와서 급히 찾아본다. 낮을 비, 겁낼 겁, 그러니까 '하는 짓이 비루하고 저열하고 겁까지 많다' 이런 뜻이었다. 평생 살면서 비겁의 뜻을 찾아본 것도 처음이고 이런 뜻임을 알게 된 것도 이 순간이 처음이다. 그 뜻이 깊다, 그저 겁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 밑에는 비루함이 깔려 있었다, 천박함, 저급함, 비열함 그리고 비루함이.
두려움이 꼭 비겁과 동일한 개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려움에서 비난 가능성을 많이 찾을 수는 없다, 나는 그렇다. 그 또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인걸? 어쩌겠어, 본인이 두려움을 느낀다는데? 그저 안타깝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뿐.
그런데 비겁으로 넘어가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제 비난할 많은 것들이 내 눈에 보인다. 그 사람의 기본적 인성과 성장 환경, 평소의 도덕적 관념과 가치관 뭐 이런 수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비겁은 그만큼 비난의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그만큼 더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 나 또한 차라리 두려움을 택하지 비겁을 손에 쥐지는 않을 것이다.
넷, 이번에도 욕심이다.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싶은 과욕의 발현이다. 거절당하는 수모는 싫고 그것이 주는 쪽팔림 (타인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도 싫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는 싶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기회는 나를 지나간다.
다섯, 판단력의 부족이다. 평소의 연습의 부족이기도 하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그렇게 만들어진 상황, 그 복잡함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결국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일상의 연습. 꼭 필요하다. 물론 최종적인 실행력의 부족과도 연결된다.
여섯, 게으름이다. 의욕의 부족이다. 열정의 부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은 더 많은 열정을 가진 자가 이긴다 (Whoever has more passion wins)' 내가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경구다. 다른 글에서 (아마 아직 발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의 영역에서는 조금은 덜 사랑하는 자가 이긴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미 세파에 찌들고 나이 든 작금의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임을 이해하시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찬스가 오는 경우가 있다. 그건 정말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삼 모사와 조사 모삼은 크게 다르다고 나의 다른 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다.
우연히 온 것이든, 상대방이 어렵게 그 마음을 열어서 비로소 내가 만나게 된 천재일우이든, 아니면 평소 나의 아쉬움과 간절한 바람이 신에게 섭리에게 대자연에게 전달된 결과이든, 아무튼 내 손에 꼭 잡아야 한다.
그 화해의 순간을 놓치면 다음번 언제 다시 올 지 모를 그 기회. 그때까지 두 사람의 서운한 감정/소원해진 사이/냉랭한 공간/잃게 되는 그 수많은 아름다움의 시간들, 이런 것들의 크기는 그야말로 눈덩이 처럼 불어난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것들 외에 여전히 배부른 힘겨루기의 감정/턱도 없는 나이브한 헤게모니 싸움/어쭙잖은 자존심의 잔재/오만하고 위험한 길들이기의 시도, 이런 위험 요인들이 가세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기회보다 화해와 사과와 관계 복구의 찬스를 더 많이 놓치는 이유다.
이때 용기라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맹자의 '측은지심'이 크게 그 역할을 한다. '그저, 그냥 불쌍하잖아?'
오해는 마시라,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그런 다소 부정적인 느낌의 말이 전혀 아니다. 상대방을 낮추어 보거나 가볍게 보는 것 물론 아니다. 오히려 나의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수용의 깊은 의지가 들어있는 '아름다운 말'이다.
'결국에는 일이 되도록 하는 (getting things done)', 이것은 늘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구다. 설령 내가 좀 굽히면 어떻고, 잠시 내 얼굴이 깎이면 또 좀 어떤가? 결국은 상황을 바로잡는 그것이 더 큰 일 아닌가? 왜 그것을 상대방이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는가? 내가 하면 안 되나?
그것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다. 이것이 우리 사는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비기이다. 내가 먼저 하면 상대방 또한 그것을 고맙게 기억하고, 또 언젠가는 이번에는 그가 그렇게 할 것이다. 나의 이웃도 저 먼 나라 나의 친구도 그리 할 것이다.
기회는 가급적 잡으면 좋겠다, 여러분도 나도. 특히 끊어진 것을 다시 잇고 멀어진 관계를 다시 가깝게 하고, 그것들을 위한 화해와 사과. 그리고 따뜻한 내 마음 솔직하게 보여주기의 기회와 찬스는 꼭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오늘 이 글의 핵심 메시지다.
오늘의 시를 본다.
평소 일상 속에서의 작은 어떤 사건들이나 관찰을 통해 이 세상의 오묘함과 그 속의 수많은 가능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멋지게 표현하는 곽재구 시인의 시다.
오늘의 시는 조금 어렵다, 내게는 그렇다. 읽고 또 읽는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이럴 때는 시인에게 그냥 물어보고 싶은 유혹과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이 아름다운 시는 이미 내게 시가 아닌 것이 된다. 그 아름다움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임을 나는 안다.
제목은 '희망을 위하여'인데 어째 내가 보기에는, 내가 느끼는 바는, 시인은 이미 그 희망이 그리 희망 가득 보이지 않음을 보고는, 절망 속에서 마지막 외마디 희망을 외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희망을 부르는 그의 외침이 슬프고 무겁게만 들린다.
지금 힘들어도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어' 하고 힘차게, 자신 있게 말할 수있다면 지금 너를 껴안은 이 두 팔을 나는 풀지 않을 것인데. 그런데? 아무래도 자꾸 그런 확신이 작아져만 가는가 봐요? 왜일까요?
그럴수록 더욱 너를 포근하게 감싸안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더 깊어져서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아쉬운 내 마음도 추스리고 고요하게 나 스스로를 누일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한시도 잠들지 않으련만.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저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을 달려오는 이 세상의 슬픔도 의연하게 당당히 지켜볼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왜인지 나는 자꾸만 그런 자신감과 희망이 줄어만 가네? 왜일까?
너에게로 가는 나의 마음의 길이 잠시 살짝 굽어져서 오늘은 그 끝부분이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굳이 불안해하지 않을 것인데. 어둠 속에서 오늘도 네게로 가는 나의 발걸음이 불빛 없는 들판에서 이리의 목소리처럼 그렇게 울부짖을지라도, 그럼에도 내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너를 굳게 껴안은 이 두 손을 결코 풀지 않으련만!
점점 힘이 빠지고 흔들리고, 너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이전처럼 그런 확신이 없어! 왜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그래서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여전히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아직은 그 희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