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슬픔, 긴 여운의 감정들, 우리네 삶. 황동규 '더딘 슬픔'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 그리 표현하지요. 동양에서는 '운다'라고 하지요. 새가 운다, 풀벌레 우는 소리, 산짐승들의 울음소리... 물론 슬퍼서 우는 그런 뜻의 울음은 아니지요. 그저 '소리를 낸다' 이런 뜻입니다. 일본어의 경우에는 이 운다라는 단어가 그 상황과 표현의 필요에 따라 좀 더 세분화되어 있기는 합니다.
으악새는 그 울음소리가 정말 듣기 싫을 정도입니다. 가래 낀 외마디 비명의 소리 혹은 잔뜩 심통이 나서 식식거리면서 끝까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지르는 분노의 목소리, 아무튼 뭐 그런 소리입니다. 오죽하면 으악 으악이라고 표현하겠어요? 옛말에도 시끄럽게 왁왁 거리는 사람을 두고는 '왜가리마냥 소리를 지른다' 그리 표현했답니다. 네, 으악새는 바로 왜가리를 말합니다. 왁새라고도 합니다.#1
왜가리라는 이름도 그 특이한, 아니 다소 천박한 울음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하긴 꿩도 그 울음소리가 정말 꿩 꿩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진짜 그렇게 울어요. 그러고 보니 많은 새들의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네요.
원래는 여름철새라서 가을이 되면 동남아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한반도에서 겨울을 난답니다. 사실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상황이지요. 분변, 시끄러운 울음소리로 인해 집단 서식지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늘고 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생태계에 있어서도 수달, 가물치와 함께 현재 국내 하천의 최상위 포식자랍니다.
가수 고복수님이 '짝사랑'이라는 노래를 부른 때가 1932년이니 거의 93년 전 얘기네요.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그때 이 가사를 쓴 분에 대한 시비도 아니고 뭐를 어쩌자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냥 어제 오늘 문득 으악새/슬픈 가을/이내 다가온 겨울/사라진 한국의 아름다운 10월, 이런 것들이 생각났지요. 그래서 마침 잘되었다 싶어 으악새, 왜가리를 잡아든 것입니다.
두루미 (학), 백로, 왜가리 그리고 황새, 다 그것이 그것인 것 같아 좀 찾아보았습니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기 위해서요. 그런데 여전히 그게 그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찾아본 것을 공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두루미는 쉽게 구분이 됩니다. 머리 정수리 부분이 빨개요. 처음에는 빨간 털인 줄 알았는데 그게 털이 아니고 그냥 피부입니다.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서 빨갛게 보이는 것이지요. 도톨도톨 좀 징그러워요 사실. 미래의 짝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랍니다. 머리 부분 바로 드러난 혈관, 사람의 경우라면 겨울철 추위에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고 두루미 그들이 뭐 방한모를 쓸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번식지가 저기 엄청 추운 러시아 시베리아 쪽이에요. 두루미는 왜가리와는 달리 겨울철새거든요? 겨울이 되기 전 북쪽 추운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들의 흰색 또한 짝이 될 후보자에게 쉽게 눈에 띠게 하려는 목적이랍니다.
두루미는 비행시 목과 몸이 일 자로 됩니다. 황새도 그렇다네요? 황새는 꼬리 부분만 검습니다. 백로와 왜가리는 목을 에스 자 모양을 하고 비행합니다. 백로는 깃털이 새하얗고 왜가리는 잿빛 회색입니다. 두루미는 백로의 크기의 두 배 이상입니다. 몸의 길이는 140cm 정도, 몸무게는 10-15킬로 정도. 정말 큰 새이지요.
두루미의 발성 기관은 길고 코일 형태로 말려 있답니다. 관악기의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낼 수 있는데 '뚜루루루' 이렇게 웁니다. 제가 들어보니 정말 그래요. 그래서 그 이름이 순 우리말 두루미입니다. 일본어로는 '츠루'라고 하는데 이것도 바로 이런 울음소리에서 유래한 것이랍니다. 라틴어 이름 '그루스' (Grus)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야 더딘 걸음으로 오늘 글 제목의 내용으로 돌아갑니다.
하나, 그때 그 작사가가 들은 으악새의 울음소리, 분명 슬퍼서 우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저도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보았지만 전혀 슬픈 소리가 아니었어요. 사실은 주로 경계의 소리랍니다, 먹이 활동을 하거나 낯선 존재가 등장한 경우에 내는. 그래서 그렇게 신경질적이고 위협적이고, 듣기 싫은 소리인지도 모르겠어요.
새가 슬픔을 아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들도 상실감에 대한 인식은 있다고 하네요. 거의 100년 전이니 그때는 왜가리들이 가을 무렵 다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는 철새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겠지요? 새삼 크게 정이 든 것도 아닐 것이고 뭐 그리 슬플 일이 그들에게 있었겠어요? 설렘은 있었겠네요, 어쨌거나 새로운 곳으로 가니까.
아마도 그때 그 작사가의 마음이 많이 슬픈 상태였나 봐요. 그래서 그 시끄러운 으악새 울음소리도 그저 슬프게만 들린 것일까요? 하긴 노래의 가사 전체가 슬픔을 말하고 있어요. '지나친 세월/잊혀진 그 사랑/서리맞은 짝사랑' 이런 것들이 주인공을 울리고 있네요.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결을 맞추었을 겁니다.
둘, 가을은 과연 슬픈 계절인가요? 더운 여름이 지나고 드디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풍성한 수확의 시기, 여성도 남성도 모처럼 제대로 멋을 부릴 수 있는 그런 계절, 금전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이런저런 걱정을 해야 할 맹추위 겨울은 아직 오지 않은 그나마 여유의 시간들, 두루두루 좋은 계절 아닌가요?
환절기라 그냥 '멜랑꼴리'한 상태가 되는 걸까요? 그리스어 '멜랑' (melan, 검은 색)과 '콜레' (chole, 담즙)가 합쳐진 이 말, '검은 담즙병'. 이유 없이 깊은 슬픔, 침울함 혹은 우울함 등을 느끼는 상태.
갑자기 일조량이 줄어들고 그래서 우리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 '세로토닌'이 줄어 든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떨어지는 낙엽, 이런 것들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를 기준으로, 나이가 드니까 이런 센티멘털한 것들로 크게 슬퍼하거나 감상에 빠질 여유는 별로 없어요. 좋은 점이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요. 이것을 앞서는 슬픈 요인들이 많거든요?
아침 산책 때 보게 되는 아주 가난한 할머니/한쪽에는 이 나라에서 아직은 귀한 메르세이데스가, 바로 그 옆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져 폐품을 줍는 여인의 모습이/밤이 늦도록 온 동네 떠나가라 큰 소리로 가라오케 시설을 이용해 노래를 부르는 동네 주민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그런데 나는 이런 곳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나의 이번 겨울 그리고 내년 겨울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인가...
셋, 한국의 시월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열두 달 중 5월과 10월을 제일 좋아했지요. 물론 눈 내리는 겨울도 좋아하구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5월은 그만 여름에 잡아먹히고 그나마 남은 것이 10월이었는데 이제는 그 마저도 사라질 위기인 것 같아요. 이상 기후 변화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사과 재배지가 계속 북쪽으로 올라온다면서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한국의 가을은 참으로 멋지지요. 햅쌀이며 햇과일이며, 먹을 것들이 풍성해지지요. 단풍구경을 위한 여행 혹은 등산,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지요? 전어가 나오고 대하가 식탁에 오르고, 특히 10월에는 감성돔과 삼치가 제철입니다. 한국의 먹거리 중에 외국에서는 결코 즐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싱싱한 생선이지요. 꼭 회가 아니더라도, 구이/조림/탕, 아 먹고 싶네요!
아 참, 가을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수꽃게를 즐길 수 있지요. 저는 살을 발라먹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들 녁석은 어릴 때부터 꽃게찜을 정말 좋아했어요. 제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꽃게 등딱지에 살을 발라 모으지요. 그런 다음 그 작업이 다 끝나면 그 살을 따로 옮겨 담고 그 게딱지에 밥과 게살, 게국물을 조금씩 넣어 음미하며 먹습니다. 그 녀석은 간장게장도 좋아합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방학 중에 서울에 잠깐 들어오면 그날 바로 신사동 간장게장 골목으로 직행했지요. 저는 간장게장은 아예 못 먹습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아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요. 그냥 죄다 아무렇게나 버리지요. 제가 버리는 쓰레기는 늘 거의 일정합니다. 껍데기 혹은 껍질뿐입니다. 삶은 감자 껍질/삶은 고구마 껍데기/사과 껍질, 남기는 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지구를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라고 저는 늘 그리 생각합니다. 아무 것 아닌 듯해도, 아주 작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갈 때마다 마음 편하고 기분 또한 좋습니다. 아마도 버린 쓰레기 봉투만을 보고도 쉽게 저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으악새/새들의 울음소리/가을/쓸쓸함/슬픔/나이 듦/한국의 가을/단풍놀이/풍요로운 가을의 먹거리/살짝 아들 생각,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의 시를 봅니다.
황순원님의 '소나기'의 정서가 저는 그대로 느껴진 시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묵직한 시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특히 깊은 슬픔의 감정은 길게 오래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불을 끄고 나서도 형광등 불빛은 한참을 그대로 남아있고, 눈 그치고 시간이 지나도 길모퉁이의 눈은 다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고, 봄이 왔음에도 아직 피지 않은 나뭇가지들이 마치 버티듯 있는 것처럼 그렇게.
어쩌면 자신도 죽고 난 후 얼마동안 그대로 숨죽이고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다고 묘한 얘기를 하시면서. 현세에 대한 여전한 미련은 아닌 것 같고, 누구 아직은 더 지켜보고 지켜주어야 할 존재가 있는 것일까요?
이미 가버린 그대, 이미 한참 전에 불은 꺼지고 다른 세계로 갔음에도 내 마음에는 아직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을 하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봄은 너무 더디게만 간다고 푸념을 합니다. 이제는 가야 한다 생각하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아직도 잊지 못하고 가슴 가득 남아있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추억을 살짝 원망하는 것일까요?
"왜 봄님은 그렇게 느리게, 느린 걸음으로 가시는 건가요? 내 나이 지금 몇인데 아직도 이리 이곳에 두고 보는 것인가요? 내 사랑하는 사람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내 마음에는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그대로 남아있게 그리 하시는 건가요? 아 좀 빨리빨리 가 주세요, 이 모든 것들도 그참에 함께 데리고 가세요, 제발!"
이 말을 듣고는 두 손을 곱게 모아 간구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며 왜가리 울음소리로 불만의 표시를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인데...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간구? 왜가리의 항변?
#1 - 작곡가가 작사자에게 물었답니다. 으악새가 뭐냐고. 그의 대답, 고향 뒷산에 오르면 으악 으악 하는 새 울음소리가 들려 그냥 으악새로 했다. 이런 기록이 작곡가가 쓴 책에 있답니다. 또 2절 가사에는 뜸북새가 나오니 이래저래 새가 맞는 것 같아요.
일부 지방에서는 풀 억새를 으악새라고 부른다지요? 그런데 갈대와 비슷한 이 억새풀은 바람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서걱 서걱합니다. 갈대의 부드러운 소리와는 사뭇 다르지요. 조직 자체도 참으로 억세지만 그 내는 소리 또한 거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