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끝을 맺는 '기술'의 중요성, 끝내기로 잃지않기

- 바둑의 끝내기, 프로가 되기, 여유 속의 웃음. 최영미 '선운사에서'

by 가을에 내리는 눈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렇게 제 글을 시작합니다.


우선은 오늘로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주는 떡이니, 인심 한번 크게 쓰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오늘 평소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보다 조금 더 줘도 결국 앞으로 줄 일은 없으니 내게는 남는 장사다). 내 가치 기준으로 보면 미운 놈에게 자꾸 떡을 줄 이유는 없다, 물론 그럴 마음도 없고.


둘, 보여주기의 속셈이 있을 것이다. 미운 놈 그가 보고 주위에서도 남이 나를 보고, 그러니 내 평판 관리를 위해서라도. '참 여전히 후덕한 사람이네? 저러기 쉽지 않은데?' 속임수만은 아니다, 그 행동으로 내가 그 미운 사람에게 그리고 남에게 뭐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셋, 마지막이라는 끝이 가져다 주는 내 마음의 여유가 그리 하게 할 수도 있다. 첫 번째의 경우와는 또 살짝 그 결을 달리한다. 위에서는 셈이 작용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실제 감정이 그리 하게 허여하는 것이니까. '아 그냥 좋아, 마음 편하고 속 시원해. 이제 다시 볼 일 없잖아?'


넷, 확장된 측은지심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불쌍한 사람인 것을,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니까. 그동안 몰랐던 그에 관한 얘기들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그저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것은 좋은 것이다. 내가 조금은 더 선해진 것이고 그래서 내가 다른 누군가를 조금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니까.


문제는 이런 경우가 현실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개꼬리 삼 년 묻어놔도 족제비털 안 된다 (구미삼년 불위황모)'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개꼬리는 100년을 묻어 놓아도 결코 황모, 비싼 족제비털이 되는 경우는 없으니까.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변화, 개과천선을 말하고 있다. 나도 그리고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그 상대방도,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다섯, 위험의 관리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동인이기도 하다. 상대방에게, 특히 내가 미워하는 자에게 내 속을 그대로 훤히 보여주어서는 곤란하다. '나 너 싫어하는 것 알지? 잘 알지 너도? 떡을 더 준다고, 내가 너에게? 미쳤냐? 나 너 싫어해. 지금 이 하나 주는 것도 싫어. 하지만 하나는 꼭 주어야 한다고 해서 그냥 마지못해 주는 거야. 너도 알 거야 지금의 내 마음. 그렇지?'


이렇게 '확실하게' 재앙을 초대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초보도 이런 초보가 없다. 왜? 뭘 위해서?


법이 정하고 있는 형벌의 가장 큰 의미와 목적에는 징벌을 통한 보는 사람 (특히 피해자 측의)의 감정적인 만족감에 있다. '권선징악', 그 사람이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아야 내가 비로소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많은 경우 실제로 그렇다. 그때 마침내 이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사람들은 느끼고 확인하고 만족한다.


그런데 그건 그냥 법에 맡기면 된다. 내가 집행관이 될 이유는 없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내가 왜 자기를 미워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자신의 과오나 실책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만을 늘 기억한다.


고마운 감정을 되갚으려 하듯이, 나쁜 감정은 반드시/꼭/기필코 되갚으려 한다. 그것이 인간의 오래된 감정이고 어쩌면 본능이다. 스탈린의 뒤끝은 정말 무서웠다고 한다. 자기에게 나빴던 감정은 그 크기와 이유를 막론하고 결코 잊지 않았단다. 그러고는 결국에는 무서운 보복을 했다. 함께 권력투쟁의 과정에 나섰던 정적 네 명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추적해서 죽인 일은 내가 생각해도 그저 무섭다.


제일 잘 나가던 경쟁자 1위 트로츠키는 일찌감치 추방되어 세계 여러 곳을 도망 다니다가 그의 나의 60세 때, 그동안 스탈린이 여러 차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결국 멕시코에서 살해된다. 다른 경쟁자들의 종말도 비슷했다. 인간의 악함을 나는 그의 수많은 잔인한 행동에서 본다. 하긴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했으니!


'공연히 (다중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내 내부의 자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 또한 그렇다. 더구나 어떤 경우에는 주관적 혹은 객관적 이유나 명분 또한 충분하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상대방을 공연히 모욕할 권리는 내게 없다. 상대방이 잘못했다. 그의 책임이다. 맞다. 그런데 내가 그를 공연히 모욕하는 순간, 나 또한 큰 잘못을 범하는 꼴이 된다. 그가 볼 때는 '이제는 피장파장'이다. 왜 그런 우행을 하나? 단순히 그 순간의 내 감정적인 만족을 위해? 그건 비용이 너무 크다.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나도 이번에 이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대놓고 보여줄 생각인 경우는 그렇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그 셈을 끝냈다. 그럴 경우의 내가 잃는 것. 하지만 그런 비용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고 싶은 것, 꼭 얻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된다, 계획하고 작정하고 이미 그 득실의 계산을 마친 경우라면. 나도 이런 수를 쓴 적이 딱 세 번 있다. 다행스럽게도 늘 총합에서 내가 얻은 것은 잃은 것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상대방에게 이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려 했다 - "나, 너와 이제 끝내는 거야. 이유? 그건 네가 물을 것은 아니고. 하지만 나는 네가 이런 방식으로 너와의 그간의 관계를 끝낸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아주기를 원해. 그래서 이런 방식을 택한 거야. 내가 그저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닌 것은 너도 아마 알걸?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지금 내가!"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 우리 속담이다. 정은 서서히, 알게 모르게 깊어가는 것이니 어느새 이만큼 깊은 정이 들었나 미처 인식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그 깊어진 정이 떠나가면, 내 눈앞에서 멀어지면 그 서운함과 쓸쓸함은 이내 알게 된다는 그런 뜻이리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당장 쉽게 표가 나지 않아도, 누군가가 누구를 싫어하는 감정은 금새 드러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정'의 시기에는 특히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포카 페이스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부러 드러내놓고 그렇게 내 마음을, 나의 감정을 보일 필요는 없다.


우선 그것이 예의다. 미워하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까지 포함한다. 무엇보다 그게 내게 큰 도움이 된다. 굳이 재앙을, 화를 내가 내 손으로 불러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출구전략 (Exit Strategy)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 재정상의 큰 어려움이나 또는 기업 경영의 과정에서 이제는 거의 마무리된 위기상황에서 매끄럽게 정상의 상황으로 옮겨타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작금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다른 단계로 옮겨가는 그야말로 탈출의 전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같은 세계 고산 등정에서 사실은 등정에 성공하고 그곳에서 하산하는 과정이 더 위험한 여정이라고 한다. 등정은 했지만 내려오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것은 성공한 등정이 아니니까.


우리도 이런 출구전략을 가지고 관계의 정리에 임하자. '스무딩 오퍼레이션/파인 튜닝 (smoothing operation/fine tuning, 미세조정)이라는 경제 용어도 있다. 급한 김에 나는 이것도 여기에 끌어다 쓴다. 매끄럽게, 표나지 않게, 스무드하게 그렇게 빠져나오자. 그렇게 개입하고 그렇게 끝을 내자. 누가 조금 전 들어왔다가 간 것인지조차 상대방은 모르게 그렇게, 은밀하게 기술적으로, 신비롭기까지 하게.


정상에서 내려올 때 더 조심하자. 저 아래에서 '승자로서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많은 달콤함들에 너무 일찍 빠져들지는 말자. 그들은 어차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나는 우선 안전하게 잘 내려가는 일에만 온 힘을 쏟자. 저 산은 이미 내게 정복되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내게는 다행한 일인지, 아니면 여전히 안타까운 일인지 너무 뻔한 방식으로 마치 홀딱 벗고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관계의 정리와 끝내기에 임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나는 그런 아쉬운 경우를 목도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늘의 시를 본다.


이 시를 오늘 글을 위해 인용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은 물론 이 시가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오늘의 나의 메시지와도 잘 어울리니까.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시의 주인공이 동백꽃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백꽃이 지는 그 멋진 모습을 경외한다. 아직도 멀쩡한 상태의 완전체의 꽃 그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기 그냥 무심하게 툭 떨어져 내린다.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지기 전에 누렇게 시들고 잎들은 이 빠진 사기그릇처럼 그렇게 듬성듬성, 그런 모습이 없다. 그냥 쿨하다. 마치 누군가가 멀쩡한 꽃들을 꺾어서 바닥에 둔 것처럼.


나도 동백꽃의 그 기개 넘치는 당당함을 배울 수 있다면!


피는 것은 힘들어도 꽃이 지는 것은 그저 잠깐이더라고 시인은 나와 같은 놀라움의 현장 목격을 고백한다. 제대로 쳐다볼 틈도 주지 않고, 잠깐 나의 님 생각 한 번 할 기회는 더욱 주지 않고 그리 순간적으로. '언제쯤 꽃이 지겠군' 하는 인간의 판단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 속에 툭 하고 피어난 그때처럼, 내가 그를 잊는 것도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어. 저 부지불식간에 이미 땅에 내려앉아 있는 동백꽃 그녀처럼.


그런데 나는 동백꽃은 아님이 분명해. 그대 또한 동백꽃이 아니고. 저 꽃은 그렇게 쿨하게, 참으로 고고하게 지는데 나는 누군가를 잊는 것에 아직도 이리 시간이 많이 걸려, 아주 한참. 참으로 긴 시간과 고통을 요구해 내게는 여전히.

이전 03화진정한 미인 - '내면'이 차지하는 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