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하는 미, 조화와 균형. 바이런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걷는다'
미쉘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기니스 펠트로, 장만옥.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미쉘 파이퍼의 눈매와 위노나 라이더의 눈빛은 그 매력의 근원이 살짝 다르다. 기니스 펠트로의 선한 웃음과 장만옥의 묘한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출발점이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한 가지 공통점, 미인이다 미녀라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기준이 되었든 그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니면 차라리 다행인 것은, 내가 외국인인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손톱만큼도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화의 차이이고 내가 보아온 것의 차이다. 내가 가까이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고 느끼고 경험한 존재들이 아니니까.
한국 여성들의 얼굴과 표정, 그 말투, 행동하는 방식을 통해 나는 웬만큼 그들의 내면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이 든 지금은 더욱 그렇다. 별로 틀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내게 좋은 것인지 오히려 나쁜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압구정동의 내로라 하는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꼽는 미인의 기준에 충분히 부합하는 '아름다운' 여성도, 그녀의 말을 들어보고 어쩌다 그녀가 쓴 손편지를 읽어보고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좀 보다 보면, 영 내게는 매력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우가 많다. 내게는 다행인가? 어차피 그녀의 마음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니?
반면 그냥 단순 외양 기준 어느 정도의 미의 구성요소를 갖춘 여성이라도 그녀의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습관, 그녀의 사고와 지혜의 수준을 알고 나서는 크게 내게 어필하는 경우도 많다. 더 좋은 점은 그런 경우 나의 의지와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는 충분히 그녀를 내 가까이 둘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높다는 것이다.
백이면 백, 사람마다 사람에 대한 그 미적 기준과 취향을 다르게 만드신 조물주의 지혜와 선견지명에 늘 감탄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구상 이 많은 인구 중에도 굳이 극소수의 특정인들을 놓고 그야말로 아비규환 (불교에서 말하는 아비지옥과 규환지옥 그 두 지옥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울부짖는)의 난리가 계속되었을 것 아닌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에 대한 소유욕으로 인한 다툼만큼 심각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만큼 미인의 풀이 늘어난다는 현실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내게는 이 사람이 미인으로 보이고 저 사람은 다른 여인을 미녀라고 보고 있고. 좋은 일이고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미인이, 미녀가 많은 것은 좋은 것 아닌가?
'진정한'이라는 말도 사실 웃기는 얘기다. 아름다움에 진정한이 어디 있나? 그럼 뭐 가짜의, 꾸며진, 가식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저 외적으로 보이는 그 화려한 외양의 아름다움만큼, 우리 눈에 당장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드러나는 내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하면 참으로 좋겠다 그런 의미다. 그리 이해해 주시기를!
이쯤에서 고백을 하는 것이 맞겠다. 여러분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시가 있어서, 여러 날 걸려 번역한 아름다운 시가 있어서 이리 서론을 길게 끌고 오고 있다. 이제 여러분도 나도 준비가 된 듯하니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She walks in beauty) 혹은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일반적으로 이리 번역된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달리 번역한다. 시인은 그냥 그녀가 걷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아름답게/예쁘게' 걷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전문 워킹 모델이 아주 잘한다.
그녀가 걸음을 걷든 그냥 누구와 얘기를 나누든,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든, 시인이 보고 있는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저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으면 'walks in a beautiful way' (아름다운 방식으로, 곱고 예쁘게 그리)라고 썼을 것이다. 사실 'walk in beauty'는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AI도 내게 그리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걷는다' 나는 이리 번역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성숙함이 충분히 조화를 이룬 상태다. 그녀의 외양은 물론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데 그녀의 말하는 방식, 선한 마음, 일상에서의 행동들 모두 그 외적 아름다움만큼이나 곱고 우아하다. 그 둘의 결합, 뭐 달리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녀는 아름다움 속에서 걷는다', 그녀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시인이 굳이 '걷는다'라는 시어를 쓴 것은 '정적인' 전형적 외적 아름다움에 상대하는 또 다른 미를 말하고자 함이다. '행동하는/실천하는/그렇게 움직이는' 내적 미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외적인 미와 내면의 아름다움, 그 둘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이미 외양이 아름다우니 여유와 너그러움 속에 그 마음 또한 곱게 먹을 수 있다. 선한 마음으로 늘 세상과 정성껏 소통한다, 주위에 반응을 보인다. 그런 내적인 아름다움은 이번에는 다시 외면의 아름다움으로 그대로 발산, 표현된다. 세상에 그렇게 드러난다.
'Walk in beauty'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나바호족 (Navajo, 이들은 스스로를 Dine, '사람들'이라고 부른다)의 삶의 철학이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자신과의 조화와 균형 속에 살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화로운 삶, 우아한 삶의 실현에 힘쓰는 것, 그리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 모든 것들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이런의 시에서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 조화와 균형 - 삶의 모든 면에서의 평형 혹은 평정을 강조한다. 정신적인 면, 감정적인 부분, 신체적 안녕과 행복, 자연 세계와 균형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 등.
둘, 내적인 평화 - 자신의 일상 속에서 평화롭고 (갈등이나 다툼이 없는) 차분한, 균형 잡힌 마음과 정신 상태의 실현에 힘쓴다.
셋, 삶에 대한 존중 - 살아있는 모든 것, 사람과 자연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고 측은하게 여긴다.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다.
넷, 진실성 - 자신의 마음과 영혼에 진실된 자세로 살아간다. 적어도 내가 나를 속이지는 않는다.
다섯, 상호연결성 -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결성을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다. 결국은 우주와 하나임을 의식한다.
시 속의 그녀는 실존의 인물이다. 이 여인을 처음 보고 바로 그 다음날 바이런은 이 시를 썼다. 영미 시 세계에 크게 한 획을 그은 그런 대단한 시다. 소위 낭만주의 시의 최고봉 혹은 그 시작을 알린 그 유명한 시. 이 경험과 기억은 그 후 평생 바이런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별한 인물, 알려진 위대한 사람이 아닌 어느 이름 없는 개인을, 더구나 그 시대에 여인을,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시를 쓴 일은 그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6대 바이런 남작),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존 키츠, 퍼시 비시 셀리와 더불어 2세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7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다. 졸업 후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였다. 다리를 절었음에도 오히려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한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얼굴이 잘생겨서인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교계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고, 그가 지나가면 온 동네 여자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했다고 한다.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그 빼어난 외모의 부추김으로 인한 것인가, 아무튼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남녀/귀천/상대의 결혼여부) 자유로운 연애생활로 유명하다.
그의 나이 35세 때 돌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한다. 자원한 이유는 낭만파 시인답게, 그저 그리스 고대 문학에 흠뻑 빠져있던 대표적인 그리스 흠모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듬해 말라리아에 걸린 후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국 그리스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근처에는 그를 안고 있는 아테나 여신 (아테네의 수호신, 지혜의 여신)의 동상이 있다. 그를 대하는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오늘의 그 시를 본다.
그녀는 밤만큼나 아름답다. 밤도 그냥 밤이 아니다. 구름 한 점도 없는 곳,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있는 그런 밤, 그러니 갑자기 폭풍우 몰아칠 우려는 전혀 없다. 그렇게 평화로운 밤같이 아름다운 그녀.
그런 날 밤은 그리 크게 어둡지도 않다, 하늘에 별들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빛은 그리 번쩍거리 않고 그냥 차분하다, 그리고 한결 부드럽다. 그녀가 그렇다. 부드러운 눈을 가졌다. 왠지 음흉하고 교활한 여인들의 눈과는 다르다. 별이 가득한 밤의 은은한 빛이 그냥 화려하고 눈부신 빛과 다른 것처럼 그렇게.
어둠과 밝음의 완벽한 결합, 그것이 바로 시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비밀이다. 신이 쉽게 아무에게나 허락하는 그런 은총은 아니다. 그만큼 특별하다 그녀는,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는 이렇게 내적인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의 관계를 탐구해 간다.
그녀의 빰에, 그 위의 미소에 나타난 그녀의 홍조, 그녀 이마, 그 표정,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순수한, 진짜 미덕과 고결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적극적으로 대화한다. 늘 그들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인다. 물론 자신의 생각과 사고에도 반응한다. 때로는 미소로, 또 때로는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이 시는 조화 (harmony)와 균형 (balance)을 통한 아름다움의 탄생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동시에 내적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의 완벽한 결합과 조화를 찬미하고 있다. 행동하는 아름다움을 말하면서도 또한 슬쩍 다른 메시지도 제시한다 - 고요와 평안, 혹은 침착 그러나 그것 역시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있을 움직임과 이동, 동적인 상황으로의 바뀜, 그런 변화의 불가피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외국의 어느 전문가는 지적한다.
밤하늘의 별들도 결국은 움직일 것이고 밤 그 자체도 때가 되면 낮으로 바뀌듯 시인의 그녀도 바뀌어갈 것라는 것이다. 그저 오직 시 속에서만, 시인의 이 시 안에서만 그녀는 영원히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순수하고 순결한 존재로 남는 것이라고.
그래서 뭐 그런 움직임과 향후의 변화가 꼭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흐르고 움직이고, 변화해간다 그런 의미. <그 전문가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이 부분 역시 그의 말이다. 또 한번 명확히 밝힌다.>
선행을 하며 보낸 그 많은 시간들,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은 그녀의 고운 마음, 그녀의 가슴 속에 사랑의 감정이 일어났을 때 그건 정말 순결하고 청순한 정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작 시인 바이런이 내리는 이상적인 여성의 정의다.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걷는다 (She walks in beauty)
- 바이런경 (Lord Byron)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걷는다,
사방 구름 한 점 없는 곳 그리고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밤처럼 그렇게 ;
어둠과 밝음의 가장 좋은 것들이 그녀의 외양에서 특히 그 두 눈에서 다 만난다 ;
신은 화려하게 눈부신 낮에게는 주지 않는 것을 그 연한 빛 그에게는 그렇게 허락했다.
그 어둠에 극히 조금의 더함이 있었어도, 빛에 아주 약간의 덜함만 있었어도,
치렁치렁 새까만 머리카락마다 물결치는, 아니면 그녀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빛나는
그녀의 형언할 수 없는 그 우아함은 이미 반쯤은 줄어들었으리라 ;
그런 우아함 속에서 그저 차분하게 달콤한 그녀의 생각들은 그 생각의 근원이 얼마나 순수하고
그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지극히 곱고 여린, 아주 침착한, 그러면서도 그 표정은 참으로 풍부한
바로 그 뺨에서, 또한 그 이마 위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미소, 붉게 빛나는 얼굴색은
선하게 살아온 그동안의 날들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의 화합과 친목, 그런 평화로운 마음,
순결하고 악의없는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