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추억, 추석과 설, 먹거리, 가족. 백석 '고야'
저는 시 읽기를 좋아합니다. 외국 시의 경우에는 직접 번역해서 상미하는 것을 즐깁니다. 얼마 전부터는 '시에서 나를 보다'라는 다소 거창한 슬로건 하에 저를 자주 다양한 시 속에 던져 넣는 모험도 하고 있습니다.
벌써 100편 넘는 글을 발행했으니 적어도 100개가 넘는 국내외 시들을 여러 번 읽고 또 읽은 셈이지요. 제 글에 쓰이는 시는 최소 열 번은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천 번이 넘는 것이네요?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제가 얻는 것 또한 많이 달라집니다. 제 영혼이 그만큼 풍성해지고 부유해졌다는 말도 됩니다.
좋은 시인, 좋은 시들이 참으로 많지만 저는 시인 백석님을 특히 좋아합니다. 그의 잘 생긴 외모를 좋아하고 그의 사슴 같은 따뜻한 두 눈을 좋아하고, 늘 세상을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그의 여린 마음을 좋아합니다. 그의 시요? 당연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의 시 '고야', '그 옛날 내 어린 시절 밤의 추억들', 뭐 이리 이해하면 될까요? 로버트 슈만의 '어린 시절 추억 속 장면들' ('Kinderszenen' / Scenes from Childhood - 어린이 정경이라고 번역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해석은 사실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많이 아쉬운 번역입니다. 마치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까요? 나그네, 아니거든요! 독일어 원어 제목이 'Winterreise'이니 당연 '겨울 여행'이라고 해야지요?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나그네는 갔다가 언젠가는 다시 올 수도 있는 사람이고 그저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슈베르트의 이 '겨울 여행'의 주인공은 아마도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니 다시 올 수 없겠지요?)을 생각나게 합니다.
당연 음악에서보다 더욱 구체적인 상황으로, 정말 실감 나게! 음악이 아니라 시로, 말로 표현한 것이니 당연 더욱 리얼한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지 않겠어요? 더구나 그야말로 '언어의 마술사'인 백석 시인의 작품이니!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지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몇 개만 있어도 우리네 삶 속에서의 힘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 아버지와의 좋지 않았던 관계, 이런 아쉬움들이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대로 그려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을 때 침대 가까이에 있던 딸에게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구절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아버지와의 소원했던 그 안타까운 관계를, 그는 이런 식으로 해소하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아마도 다른 세상에서는 먼저 가 계시는 아버지와 현세에서와는 전혀 다른, 참으로 좋은 관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이 또한 그야말로 우연인데, 이 글을 발행하려는 내일이 바로 한국의 추석이네요. 백석시인의 이 시의 시간적 무대는 설날 (구정) 전날이에요. 추석과 설날, 한국의 가장 큰 두 명절이지요.
백석시인이 그의 나이 24세 때 쓴 시입니다. 그의 첫 시집 (그리고 마지막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의 시 중에 가장 긴 시입니다.
우선 명절답게 먹을 것들이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겨울철 설인데도 송편이 나오네요. 평안도 특산 조개송편, 달송편, 죈두기송편 (아주 작고 동그랗게 빚은 송편). 평소와는 달리 환히 불이 밝혀진 부엌에서는 솥뚜껑을 들썩 거리며 곰국이 끓고 있어요. 다른 음식들도 물론 많겠지요? 내일이 설이니까, 큰집이니까, 모든 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니까.
곧 시집갈 막내 고모와 엄마가 등잔불에 쌍심지를 켜고 밤늦도록 바느질을 하는 사이, 어린 시인은 삿자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귀퉁이를 들고 그 밑에 놓여있는 적당히 말라 시들시들해진 밤을 먹습니다. 은행열매도 화롯불 인두에 구워 먹지요. 그래도 심심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혼자 놀아봅니다. 엄마가 해주는 천도복숭아 얘기도 듣고, 고모에게는 내일 메추리를 잡으러 가자고 조릅니다.
자기도 엄마와 고모 틈에 끼어들어 당장이라도 손에 흰쌀가루를 잔뜩 묻히며 떡을 빚고 싶지만 끼워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아련한 어린 시절 명절날 전날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지요. 그런 소중한 시간들이, 그런 만남과 함께 하는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아마도 쉽게 다시 오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추억은 아름답다 하는 것이겠지요?
추석날 아침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가기를 기원합니다.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고 추억은 기쁘게 즐겨 소환하는 사람들의 것이며, 행복한 삶 또한 행복하려 아니 이미 행복하다 애쓰고 만족하는 분들의 것입니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의 하나! 내 인생은 나의 것! 달콤함, 즐거움, 기쁨, 그리고 행복, 결국은 자기가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
# 다른 글들에게 순서가 밀려서, 추석이 훨씬 지난 이제야 발행합니다. 그럼에도 그냥 고치지 않고 명절 느낌 그대로를 살리려 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여러분! 10월이 가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