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겁의 소음, 멈춰 서기, 함께 살아가기. 박진형 '소리'
조용한 환경을 좋아한다. 특히 주거의 공간은 그것이 필수다. 내게는 그렇다. 물론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지나친 소음은 나의 거의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사고하는 능력까지 빼앗아가는 것 같다.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어려움 중에 이것이 제일 크다. 확보된 상시적 안식처가 없다. 내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더욱 없다. 주변에 압구정 한양 파출소는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그 공간과 상황을 견뎌내는 것 밖에는 달리 수가 없다.
어릴 때는 나도 개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웠다. 같은 이불 속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뿐이다. 그래서 어린이였나 보다. 커서는 개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뭐 그냥 중립? 그런데 러시아에 인접한 작은 나라 조지아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개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아 그곳의 개를 말함이다. 오해 마시기를!
낮이고 밤이고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들. 집에서 키우는 개도 그 많은 길거리 개들도 밤이면 더욱 시끄럽게 짖는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그야말로 호러블 (horrible), 무섭고 소름 끼친다. 그런데 그 긴 밤 내내 어느 누구도 뭐 어찌하는 자들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집에서 자고 있는 그 개의 주인은 그때도 그저 사랑스러운 소리로 들릴까?
이웃 누구도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는다. 몽둥이를 들고 나가 내가 쫓고 싶을 정도였다. 숙면은 이미 오래 전 물건너 갔다, 그 나라 그 도시에서는.
지금 있는 이 나라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한다. 역시 낮이고 밤이고 짖어댄다. 밤에는 신음소리를 낸다. 여기는 길거래 개들은 조지아만큼 많지는 않다. 그러니까 거의 집에서 키우는 개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주인들은 왜 그런 개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일까?
나는 당장이라도 앞집으로 달려가 이리 말하고 싶다 - "당신 집의 개가 낮이고 밤이고 이 동네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아느냐? 왜 그리 그냥 두느냐? 당신이 주인이냐 그 개가 당신의 주인이냐?"
마치 내가 개들의 땅, 개의 지배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여기는 인간의 영역이다. 그런데 기실 그들이 지배한다. 적어도 소음에 관한 한은 그렇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배변과 소변에 관해서는 그렇다.
나는 요즘 비로소 '개소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실감한다. 원래 이 단어의 어원은 꽤나 깊다. 이야기 또는 말을 의미하는 '소리'에 '헛된/가짜의/쓸데없는'의 뜻을 가진 접두사 '개'를 붙여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이를테면 헛소리다. 사실 개와는 큰 관계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동물 개가 등장한다. '개가 짖는 것과 같은 헛소리' 이렇게 해석이 되기 시작한다. 개로서는 억울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괜히 거기다가 가만 있는 자기들을 가져다 붙이나?
문제는 그들이, 그 개들이 평소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성경에서조차 개들을 그리 나쁜 존재로 취급하나? 수없이 등장한다, 개의 지극히 부정적인 면을 빗대어 하는 비유와 비교의 장면이.
우선은 사납다. 늑대에서 분리되어 인간에게 사육되기 시작한지는 1만 5천 년 전부터라고 한다. 개는 회색늑대의 후손이다. 인간의 야영지 근처에 나타나 상호 적응하며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개는 인간의 손에 의해 길러진 가장 오래된 동물 중의 하나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한 석기시대부터 함께 하기 시작했다. 가축이 된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인간의 '선택적 사육' (selective breeding)이 오늘날의 인간 친화적인 개를 만들어냈다. 여전히 늑대같은 사나운 개는 죽이고 말 잘 듣고 친근한 개체를 선택해서 번식시킨 것이다.
그러나 야생 혹은 본능은 언제나 살아있다. 그것이 모든 살아있는 개체, 종의 특성이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운다. 개싸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직접 그들의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면 이 말의 뜻이 그대로 와닿는다. 당연 소란스럽다.
조지아에서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바로 '블러핑' (bluffing, 뻥치기/허세 부리기/그렇게 상대를 속이기)이다. 그저 멸시의 헛웃음이 나왔다. 개를 더욱 낮게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 주인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고 관리되는 많은 개들은 그 대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여기 길거리 개들이 있다. 마침 주인이 그 목줄을 잡고 함께 산책하는 집개가 있다. 길거리 개들은 본능적으로 짖어댄다. 당연한 영역 방어의 행동이다. 그런데 막상 그 집개가 근접하면 그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짖기를 계속한다.
어쩌구니 없는 뻥치기의 극한이었다. 짖기는 해야 하겠고 눈을 마주하며 대적할 자신은 없고, 그렇게 비겁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자신과, 주변 자신의 동료들과 타협한다. 비굴, 비겁의 극치다. 나는 그때부터 개를 달리 본다.
겁과 비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얼마 전 할 기회가 있었다. '겁'은 그야말로 두려움이다. 그것이 소심함에서 오는 것이든 실체적 공포의 존재 때문이든, 아무튼 지금 내가 갖게 된 두려움 혹은 무서움의 감정이다. 굳이 뭐라고 비난할 소지는 많지 않다. 그런 것을,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인 것을?
그런데 '비겁'은 전혀 다르다. 비루함이 들어간다. 우아하게 겁을 내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루함까지 더해서 겁을 먹을 것은 아니다. 내가 여러 차례 목도한 개들의 그 블러핑은 그저 비루한 겁먹음, 바로 비겁이었다.
지저분하다. 이 점에서는 고양이와 또 다르다. 아무 데서나 크고 작은 변을 본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에게서 관찰되는 자신의 변 숨기기 작업도 없다. 그냥 길 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변을 보는 그 광경 또한 나는 아주 질색을 한다. 뭐 그렇게까지 천박하게!
위에서 비겁을 말했지만 내가 보는 개들은 충분히 비굴하다. 비열하다. 유대인들이 돼지를 싫어하는 이유, 그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온 과거의 돼지가 더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위생적이라 혹시 그 고기를 먹고 어찌 될까 두려워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비슷한 이유에서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아무나 따르는, 먹이를 주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과도하게 꼬리를 흔들며 따라나서는 그들의 행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 애호가, 애견인의 시대에 오늘 내가 지금 무슨 이런 용감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나? 또 다시 말씀드린다, 오해 마시라. 일부 국가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본 소수의 개, 특히 주인 없는 길거리 개들을 놓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제한된 공간에서 하는 얘기일 뿐이다. 이런 정도의 의사표현의 자유는 누려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르겠다, 그 조지아의 길거리 개들이 나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면 또 어떤 일이 생겨날지?
아마도 공연성이나 비난의 목적성 자체가 극히 적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정성도 없고. 지금 내가 1번 개 2번 개를 특정해서 적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 글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내가 말한 개 소리는 '개가 짖는 소리'다. 모르겠다, 그것이 그저 우리 귀에 들리는, 우리가 말하는 짖는 소리일 뿐인지 아니면 그 또한 그들의 의사표시의 한 형태인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들의 소음으로서의 그 짖는 소리, 말하는 소리는 더욱 크게 비난받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고통에 외치는 울부짖음이 아니니까!
시를 본다.
내 서랍에는 많은 글들이 자신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이 시는 분명 어딘가, 아직은 발행되지 않은 나의 글에서 사용되었다. 내가 기억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이 글에 잘 어울리는 시라서 그냥 쓰기로 한다. 두 번 쓰면 뭐 어떤가? 나의 해석이 다르고 그 쓰임의 상황이 다른 것을? 또 같으면 어떤가? 좋은 시, 좋은 글은 몇 번을 읽어도 좋다. 냉장고에서 몇 달을 잘 익은, 뜯지 않은 조선호텔 포기김치처럼 더욱 맛있다.
어제까지 내가 즐겨듣던 음악이 오늘은 그저 불안한 배경으로 내게 다가온다. 상황이 가져오는 인식의 다름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일이다.
결국 시인은 이것들을 '날선 소음'으로 규정한다. '독벌레 바람소리/마음 심란하게 하는 파도소리/내가 미처 공감하지 못하는 종소리', 더는 참지 못하고 시인은 이어폰을 꺼내 자신의 귀에 밀어 넣는다. 100% 공감이 간다. 그 상황, 그 마음 내가 알지요!
이런 식의 밀봉, 그것은 바로 최후의 선택적인 선호의 실현이다. 하나의 소리에는 내 귀를 인위적으로라도 닫고,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소리는 그대로 아름답게 내 안에 피어나게 하는, 그 공들인 소리의 선별 작업.
시인의 멋진 말이 이어진다 - '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으면 보이지 않는 소리의 이면이 보인다. 모든 소리를 밖에 두어야 닫힌 귀뿌리에 소리가 돋는다'. 나도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성질이 모나서 귀에 이어폰을 하지 못한다. 갑갑하고 답답해서, 궁금함과 호기심 때문에 잠시라도!
'소리와 정적은 일란성 쌍둥이일까' 갑자기 이 대목에서 나의 시적 기쁨과 희열은 많이 감소되었다. 조금 더 예쁜 표현이 있었을 것을? 감히 주제넘게 이런 아쉬움을 갖는다.
(다시) 귀를 열고 입을 닫는단다. 소리를 보기 위해 소리를 감는다, 조금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이 또한 아쉽다. 아무튼 그 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조만간 이 집 호스트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 집이 좋다. 옥탑방 같은 내 방이 좋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좋다. 커튼을 걷으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그 따스한 햇살이 좋다. 그러니 내가 이 아름다운 공간을 더 오래 즐길 수 있게 나를 도와달라.
일전에 가볍게 얘기한 저 앞집의 그 개, 개들. 낮이고 밤이고 그들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내가 그들의 땅에 들어와 눈치보며 살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분명 인간의 영역, 사람을 위한 공간 아닌가? 우리가 주인 아닌가?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 무언가를 해달라, 꼭.
이건 아니다, 낮이고 밤이고. 그냥 듣기가 싫다, 산책 중에 만나는 개들의 모습도 싫다. 이것 또한 굳이 그럴 것은 아님을 나도 안다. 상황이 그리 만들어가는 것뿐!
해결을 하자, 솔루션이 있을 것이다! 개 소리, 아니 개가 짖는 소리를 그저 싫어만 할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내가 다시 할 수 있게 나를 도와달라. 당신은 할 수 있다.
# 그래서 내가 알게된 '개소리'의 의미는? '개 짖는 소리'
짜증나고 시끄럽고, 비루하고 비겁한 한 동물의 아무 생각 없는 반복의 행위. 극도의 소음, 때로는 호러블한 외부적 자극.
영역에 대한 방어 및 경고/두려움, 놀람, 반가움의 표시/욕구불만 그리고 관심의 요구/그들간의 상호 소통의 수단/불안 및 스트레스/특정 품종의 유전적 특성. 그런데 외로움의 표시로/주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그저 자신의 짖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습관적으로 짖는 개도 있다고!
원인을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적절한 대처를 해야/훈련의 필요성/긍정적 부정적 강화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야/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와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