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1급 살인? 우발적 범행? 그 또한 피해자?

- 언쟁의 위험성, 늘 삼가는 지혜, 유혹 물리치기. 이수익 '~ 편애'

by 가을에 내리는 눈

얼마 전 산책 중에 무거운 돌을 하나 들고 왔다. 아주 무거운 돌을. 나는 원래 돌을 좋아한다. 뭐 수석, 그런 경지는 아니다. 그저 단순한 돌이지만 그 순간 내게는, 내 눈에는 그냥 흔한 돌은 아닌 그런 것들을 주워온다. 조지아에서 많이 주웠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아들, 거기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 거기에다가 신까지, 결국 모두 다섯 개가 된 작은 그 돌들. 그것이 한 세트.


또 언젠가는 내가 에버니저 (Ebenezer,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에벤에셀이라 부르는 그 돌, '신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Stone of Help')라고 이름 붙인 거의 검은 색의 신기한 큰 돌 하나. 그밖의 크고 작은 많은 돌들. 아쉽게도 그 중에서 그 다섯 개 돌 세트 ('나의 가족과 신')만 겨우 들고 나왔다.


이곳에서 주워온 돌은 사실 자연석은 아니었다. 나는 '인공의 자연'이라 그리 부르고 있다. 자줏빛 긴 구멍 여러 개가 뚫린 찍어낸 벽돌 위에 회색 시멘트가 발라진 그 구조물. 시멘트 위로 자연의 초록색 이끼가 묘하게 얹어져 있다. 이곳에 흔한 비와 세월의 흔적이다. 모양 자체도 참으로 신기한 모습으로 그렇게 깨져서 생겨났다. 어느 구조물을 철거하면서 나온 조각일 것이다. 나를 위해 그리 만들어 길에 슬쩍 내어놓은 것은 아닐 것이고.


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보는 자, 읽는 자, 힘써서 해석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특별한 것들은 다 그렇게 생겨난다.


그 돌은 놓는 방향에 따라서도 내가 느끼는 모습이 다르다. 그래서 일부러 주기적으로 이리저리 그 방향을 바꾸어 발코니에 놓는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그쪽을 바라보면 내 눈 정면으로 보인다. 비가 내려서 그 벽돌과 이끼가 충분히 젖으면 또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언제는 암사자의 모양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 호랑이의 모습이다. 이렇게 나는 요즘 내게 넘쳐나는 나의 시간을 죽인다. 그나마 나의 일상과 행동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나의 발버둥이다. '신이 도우신다',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만 된다면.


카인은 왜 자기 친동생 아벨을 죽였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이것이 궁금했다. 오랜 시간 치밀한 계획에 의한 '고살', 1급 살인일까? 아니면 그저 우발적인 범행이었을까? 두 경우 각각 그렇다면 왜? 무엇이 그를 그런 행동으로 치닫게 했을까? 법률적인 측면을 떠나서 살펴 본다면, 카인은 단순 가해자일까 아니면 사실 알고 보면 그도 가여운 피해자일까? 신은 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왜 그의 그런 행동을 사전에 막으려 하지 않은 것일까? 왜 아담과 이브의 우려와 사전 조치를 막은 것일까? 과연 어떤 깊은 뜻이 신에게는 있었던 것일까? 카인을 통해 우리 인간 세상에 전하려는 모종의 메시지가 있었을까? 그래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들어준 것일까?


그나저나 내 욕심대로 오늘 이 글에서 다 언급할 수는 있을까?


하나, 편애의 큰 부작용. 나는 이 스토리에서 두 가지의 편애를 보았다. 우선은 카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애다. 여러 글에 보면 평소 아담과 이브는 큰아들 카인보다는 둘째 아벨을 더 예뻐했다고 한다. 그 두 형제에게는 예쁜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형제간의 혼인도 가능했던 모양이다.


두 형제 다 여동생에게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 카인은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에게 말한다. 돌아온 반응에 의하면 그들은 동생 아벨과 결혼시키는 것을 선호하고 있었다. 실망, 낙담, 또 한 번의 동생에 대한 패배, 신의 제물 사건에 이어 연속된 좌절감, 회의감... '아니 내 그런 낌새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부모님마져도 내게 이리 하시나!'


성경에 보면 이런 비슷한 얘기들이 종종 나온다. 우선 야곱의 경우. 그에게는 모두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요셉은 11번째 아들이다. 그 밑에 자기 친동생도 있다. 야곱이 평소 얼마나 요셉을 편애했는지는 여러 장면에서 확인이 된다. 결국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짠다. 주목할 것은 요셉의 친동생조차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결국 죽이지는 않고 상인에게 팔아넘긴다. 그래서 요셉은 이집트에 가게 된다.


둘, 우리가 결정적 원인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건. 신의 두 형제 제물에 대한 반응.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굳이 재차 상설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둘 부분은 형 카인의 신의 반응에 대한 실망과 투덜거림에 대한 동생 아벨의 반응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핵심은 이렇다. '이 세상은, 아니 신조차도 그리 공평한 것 같지는 않아', 이리 말하는 형에게 아벨은 이렇게 대꾸한다. "아니, 그건 형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이 세상은, 특히 우리의 하느님은 공평하고도 공정하신 분이야. 그분이 형의 제물은 물리치고 내 것을 받으신 것? 그건 내 제물이 형의 것보다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어."


이런 얌통머리 없는 놈 하고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풀이 죽어있는 형에게 할 말이야? 매를 버는구먼! 이게 나의 첫 반응이었다. 이런 비슷한 두 형제간의 감정적 논쟁 혹은 언쟁은 뒤에 또 한 번 소개하겠다.


셋, 이건 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동기인데 바로 경쟁자의 사전 제거다. 카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동생 편에 서는 것 같고 다른 여러 정황상으로도 자신이 그리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은 농사를 짓고 동생은 목축을 한다.


아직 여동생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불안한 마음 가득하다. 경쟁자는 제거하면 된다, 그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넷, 이때 지금까지 내내 틈을 보고 있던 사탄이 드디어 끼어든다. 그 당시 카인이 살인을 알았겠나,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 지를 알고 있었겠나? 동생이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죽인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탄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직접 보여준다.


시범을 보이며 그렇게 끌어들인다. 어느 날 카인과 아벨이 함께 있는 곳에 사탄이 그 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인이 보는 앞에서 한 사탄이 다른 사탄의 목을 날카로운 것으로 그어버린다. 자신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 그대로. 카인의 눈앞에서 시뻘건 피가 튄다. 카인은 자신이 본 그대로 실행한다.


다섯, 카인의 타고난 성정이다. 기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 이브의 막사에서 갓 태어난 카인. 태어나자마자 그 주변의 풀들을 싸그리 쥐어뜯어버린다. 이것을 본 유모가 이리 말한다 - '이 아이는 장차 커서 무슨 큰 일을 벌이겠구나. 성정이 파괴적이고 자기 주변에 뭘 남겨두지를 못하는구나. 아이고!'


여섯,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두 형제 사이의 유치한 언쟁. 형은 땅을 갖기로 하고 동생은 동물과 농작물 등 다른 모든 것을 갖기로 두 형제가 합의를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형이 동생에게 이리 말한다 - '야, 너 내 땅에서 비켜. 네가 지금 밟고 있는 그 땅 이제부터 다 내 것이잖아. 하늘로 뛰어오르든가!' 이 무슨 유치한? 그런데 이 비슷한 장면들 우리 많이 보지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 만만한 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동생 아벨의 응수 - '그럼 형은 그 가죽 옷 벗어. 홀딱 다 벗어. 그건 형의 것 아니잖아.'


가까운 사람 사이일수록 이런 지극히 유치한 말싸움이 결국에는 큰 싸움, 결별, 사무친 증오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부부간의 다툼이 그 예다. 형제간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의 갈등과 큰 싸움도 결국은 이런 작은, 유치한 말다툼에서 시작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논쟁하지 말라, 언쟁하지 말라, 남이 보는 앞에서 공연히 상대방을 모욕하지 말라, 큰 화를 부를 것이니, 그런 말이 나온 것 아니겠나?


당연 종교적 깊은 이해나 교리적 측면에 바탕을 두고 쓴 글이 아님을 다시 밝힌다. 그저 나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별 근거 없는 픽션 같은 얘기라 그리 보시면 된다. 소설가 아닌 자가 쓴 질 낮은 소설이라 보셔도 좋다.


의문은 여전히 많고도 많지만, 지지불태,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기로 한다.


오늘의 시를 본다.


이수익 시인의 '이 나이쯤의 편애', 시인의 나이 70이 넘어 쓴 시다.


인생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시인, 그러나 그의 가슴 깊이 존재하는 그간의 굳어진 습관, 여전한 욕구와 욕망, 한편으로는 남은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일상 속의 궁핍과 결핍, 고독과 현실 속의 외로움, 이제는 쉽게 허여되지 않는 그 옛날의 그런 뜨거운 사랑,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소회와 아쉬움을 애둘러 표현하고 있다.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살고 있는 누런 구렁이 한 마리/그 혓바닥/서늘한 냉기...' '어디 갈 곳 없는가 숨찬 서성거림으로 길게 목을 늘여 바라보는 그 모습'


이 모든 것은 결국 고희를 넘긴 그 나이에도 아직도 계속되는 기울어진 사랑,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그야말로 편애라고.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라고. 그래서 어쩌면 애초 시작부터 위태로운 사랑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걸 알 것 같다고 이 나이가 되니까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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