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고독을 즐기신다구요? 정말요? 정호승 '수선화에게'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 어느 저녁 무렵 주인공 이명준과 부자집 아들인 친구 태식이 집 주변을 걷고 있다. 방금 근처 복싱 도장에서 나온 듯한 링 위의 권투선수 차림의 어느 젊은이가, 머리에는 수건을 쓴 채 쉭쉭 소리까지 내며 쉐도우 복싱을 하면서 그들을 지나간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명준은 조금은 흐뭇한 눈으로, 참 열심히 산다 그리 생각하는 눈치다. 그때 옆에 있던 태식이 불쑥 던지는 말, "고독해서 저러는 거야!"
고독이라는 말이 내 가슴속 깊이 날카롭게 찌르며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20세 그래도 꽤나 순수했던 내 젊음의 시절. 그 후 시간이 한참 흘러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하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외로워서 그러는 거야!" 또다시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때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은 우리네 삶에서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객관적으로 혼자 있는 상태다. 단순히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의 문제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상태에 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일부러, 자신이 뜻한 바가 있어서 혼자 있는 상태를 만들기도 한다. 수도사나 승려, 명상과 영혼의 치유를 위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국가고시 등 자신의 삶의 한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라이센스의 취득을 위해 한시적으로 그런 고행을 감내하기도 한다.
반면에 외로움은 내적으로 공허한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철저하게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다. 혼자라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럿이 함께 있는 상황임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독의 상태에 있다면 외로움을 느낄 가능성 또한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시인 정호승은 자신의 시 '수선화에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하느님이 왜 외로우실까? 아니, 그 외로움에 눈물까지 흘리신다고? 정말? 하지만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이 대목이 금새 나의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고마운 일이다. 오후 무렵 해가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어야 할 그 시각, 햇님의 광채가 만들어내는 산 그림자, 그 싫지않은 회색빛 그늘과 흑백의 대조, 흐뭇한 모습이다. 시인들의 사물을 보는 눈이 남과 다름을 바로 느끼게 하는 귀절이었다. 시인, 참으로 대단한 양반들!
사람의 외로움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정호승 시인은 옅은 노란색을 택했다, 그래서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시 제목을 '수선화에게'라고 지은 것이다. 철저하게 외로웠던 존재 신화 속 나르키소스와도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그런데 내게 한번 나의 생각을 말해보라고 누군가 기회를 준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인간의 외로움의 색깔은 보랏빛'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면 심홍색 (석류 빛깔, 가닛빛 garnet)일 것이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누런 흙의 색이 강하게 들어간 겨자색 혹은 카키색 (khaki)?
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늘 가득 외로움 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을 위로한다. 그렇다, 하느님도 외로워서 우시는 마당에 우리 범인들이야! 저 거대한 산들도 매일, 하루에 한번은 꼭 외로움을 느끼는데?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뭐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니,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신의 그 외로움이 계속되는 것을 방치하지는 마시라! 녹이 쇠를 좀먹듯이,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듯이, 일상 속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는 외로움은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을 크게 망가뜨린다.
내 키가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작은 키도 아니다. 젊을 때도 그리고 나이 든 지금은 더욱 더, 늘 구부정하게 걷는 내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지않는다. 그러다가 얼마 전 문득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아니지, 어쩌면 지금의 이 구부정함 덕에 내가 지금껏 이리 먹고 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공부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었던 나, 핑계일 수는 있지만, 학교 다닐 때 늘 책상 머리에 앉아 책만 들여다 본 나, 그러니 등이 굽고 어깨가 굽은 것은 그 당연한 결과지? 작은 키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서 지금껏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잖아?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만들어진 체형을 바꾸겠어? 그러니 잊을 것은 잊고,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있으니 그것을 열심히 하자. 어차피 구부정한 나의 이 몸, 그러나 걸을 때는 늘 꼿꼿하게, 거만한 듯 눈을 치켜뜨고 살짝 위를 보며 그리 당당하게 걷자, 그것은 지금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몸도 꼿꼿 마음도 꼿꼿 정신도 꼿꼿 영혼도 꼿꼿!"
그놈의 꼿꼿 얘기를 꺼내려 이리 길게 주절거렸음을 용서하시라. 일상적인 외로움은 나의 몸을, 마음을 정신을 그리고 종국에는 영혼까지 망가뜨린다는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일상적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하지만 적어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기를, 그리고 이런 저런 노력들을 다 해 보기를. 그 모든 노력들이 다 헛수고 물거품이 되었다면? 그때는 다가올 더 나쁜 상황을 기억하시라, 그리고 담담하게 준비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