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온, 우아한 마무리.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저녁 노을을 보며'
내 기준으로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거의 없다. 그래도 굳이 하나 끄집어내어 보라고 한다면 이제는 특별히 뭐 부러워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이미 먹어도 보았고 입어 보았고 가 보았고, 이와 함께 나의 욕심이나 꿈, 새로운 의욕의 수준 또한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부러운 것이 있으니,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모습이다. 서구의 노인들에게서 특히 이런 고운 모습을 자주 본다. 나의 눈에는 나이든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많이 푸근해 보이고 멋져 보인다.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가 손주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 어린 손녀나 손자의 손을 잡고 등교시키고 함께 하교하는 그들의 모습, 참으로 보기 좋고 부럽다.
노을은 태양이 뜨거나 질 무렵에 하늘이 붉게 보이는 현상이다. 태양이 지평선 근처에 있을 때 빛은 지표면을 따라 평소보다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데 이때 산란 (빛의 파동이 물체와 충돌해서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잘 되는 푸른색 계통의 빛은 도중에서 없어져 버리고 파장이 긴 붉은색만 남는다. 이 붉은 빛이 아래층의 구름 입자로 인해 다시 산란하면 구름은 전체가 붉게 보인다. 그러나 모든 노을이 붉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구와는 대기의 구성이 다른 화성에서는 오히려 푸른색 노을을 볼 수 있단다.
개인적으로는 저녁 노을보다는 아침 동쪽 하늘의 노을을 볼 기회가 더 많았다. 아침의 노을은 저녁 노을과는 또 다른 느낌과 감흥을 준다. 희망이랄까 힘찬 의욕이랄까,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보는 화려한 아침 노을을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
저녁 노을은 다른 의미와 상징을 우리에게 주지 않나? 진다/저문다/넘어간다/끝났다, 뭐 이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정서? 동서양이 다 그렇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모두 4편으로 되어있는데 그 마지막 편 4부의 제목은 '신들의 황혼 (저무는 신들의 세계)'이다. 실제로 오페라 끝부분에서 신들의 세계 발할라는 저녁 노을처럼 붉게 그렇게 불탄다.
오늘 시도 저녁 노을에 관한 것이다.
독일 시인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이 시를 읽고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시를 토대로 멋진 성악곡을 만들어낼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이 시를 시작으로 헤르만 헤세의 시 세 편을 더해서 모두 네 개의 시를 가지고 네 곡의 성악곡을 만든다.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 된 '네 개의 마지막 노래 (Vier Letzte Lieder / Four Last Songs)'다.
바그너 추종자 슈트라우스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와, 한순간도 밀리지 않고 그 거대한 악기 연주의 파도에 멋지게 대응하는 소프라노의 노래가 가히 압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체코 출신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 버전을 좋아한다.
마지막 네 번째 곡은 이 시를 가사로 하고 있고 세 번째 노래는 헤르만 헤세의 시 '잠을 자러 가면서'를 가사로 쓰고 있다. 그 두 시의 의미와 상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저녁 노을' 그리고 '잠을 자러 가는',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슈트라우스의 곡을 먼저 접하게 되었고 그 가사가 궁급해서 거꾸로 두 시인의 그 네 가지 시를 번역하게 되었다.
우선 심오하고, 때로는 즐거운 장면 또 때로는 계절이 바뀌어 그 변화를 슬퍼하는 장면,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마무리를 할 때가 된 장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시각적 흐름이 음악으로 그리고 시를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나는 이 대목이 특히 좋다. 우리가 흔히 쓰는 손에 손잡고 하고는 또 다른 맛이요 깊이다. 이제는 두 사람 다 안다, 곧 멋진 그리고 충분히 우아한 마무리를 해야 할 때라는 것을.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그 준비를 한다. 굳이 슬픔이나 서러움 혹은 큰 아쉬움은 없다. 이미 많이 살았고 많은 곳을 다녔고, 그렇게 많이 즐겼음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마무리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의 이런 뜻과 마음을 아는지, 주변의 환경도 그들을 돕는다. 저녁 노을이 먼저 나선다. "여보, 저기 보이는 저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세요. 곱지요?"
자연은 때가 되면 어김 없이, 자신들이 가야 할 그 길을 알고 그렇게 한다. 이제는 달님의 시간, 나는 어서 저 산너머로 물러가 주어야지. 그래야 내 친구 달이 편한 마음으로 등장하고 또 밤새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것 아닌가? 그렇게 쿨하게, 아무런 미련이나 미적거림 없이 그리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추는 태양을 지켜보며, 대지와 구름과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이 참으로 멋지다고 크게 박수치는 것, 그것이 저 붉고 화려한 노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그 붉은 화려한 색 속에 슬픔은 없다. 그럼 무슨 색이 숨어 있을까? 노부부가 보는 또 다른 색은 무엇일까? 글쎄요, 보랏빛? 신비하게 환상적인 옅은 초록의 색? 보석 호박 (앰버, amber)의 그 깊은 노란색? 잘 익은 석류의 심홍색 (가닛색, garnet)?
이만하면 잘 살았지? 사실 조금 피곤하기도 하지? 끝까지, 아니 이제는 끝날 시간이니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야지 우리? 평화로움, 저 화려함에서 보이는 깊은 평온, 아름다운 마무리...
시작은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끝은, 그 시작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참으로 다행이요 여보, 그렇지? 저녁 노을은 아름다워, 언제나!
저녁 노을을 보며 (Im Abendrot / At Sunset)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Joseph von Einhendorff)
부족할 때에도 그리고 큰 기쁨 속에서도 우리는 그동안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제 우리 둘 다 우리의 긴 여행을 그만두고 마음 편히 쉬고 있다, 조용하고 편안한 시골에서.
우리 주위로 골짜기들이 비스듬히 몸을 내밀고 있다.
이미 공기는 슬픈 듯 음울하게 변해간다.
반쯤은 꿈을 꾸듯,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두 마리의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이리로 오라,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날아가게 두어라.
곧 잠을 잘 시간이다. 우리는 길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쓸쓸한 곳에서.
오 웅대하고 차분한 평화, 땅거미 질 무렵의 그 심원함.
그동안의 여행에서 우리는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던가 -
이것이 아마도 죽음일까?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