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된 새끼 여왕벌의 첫 임무 - 자매 살해

- 본능, 숙명, 삶, 그리고 허무. 박경리 '대추와 꿀벌'

by 가을에 내리는 눈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 처자 울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충북 보은은 우리나라 대추의 주산지 중 한 곳인데, 그 옛날 이 지역의 대추 농사는 그야말로 한 집안의 생활은 물론 자녀의 혼인비용까지 떠맡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요. 곧 시집갈 딸의 눈물, 오는 비야 그렇다고 해도 저는 그저 마음이 짠 하네요.


대추 과육에는 과당, 포도당, 자당 등 다양한 당류가 풍부하고 아미노산, 사과산, 폴리페놀, 비타민 A/B/C 등이 들어있어 그 약리효과 또한 높다고 합니다. 꿀벌도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경험측에 의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꽃이 아닌 대추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니 하는 말입니다. 아, 조금 있다가 소개할 시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꿀벌 얘기를 좀 해 볼까요? 여왕벌이 이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새로운 새끼 여왕벌을 낙점하고 나면, 어미 여왕벌은 곧 그 집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살던 집은 딸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소수의 일벌들을 이끌고 새로운 집을 찾아 나가는 것이지요. 슬픈 이별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냥 우리네 인생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곧 여왕벌과 집을 떠날 일벌들은 저장해 놓았던 꿀을 최대한 먹으며 다음 임무의 수행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고 여왕벌과 선택된 일벌들은 집을 떠납니다. 이제 이 집의 새로운 주인 새끼 여왕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번째 임무는 바로 갓 태어난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집 안에 있는 자매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한 집에 두 여왕벌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알 집 속의 자매를 향해 특이한 소리를 밖에서 냅니다. 알 집 속의 자매가 반응하면 침을 놓아 바로 죽입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이 행동은 계속됩니다. 혹시 살아남은 다른 자매가 있다면 후일 둘은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아니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집을 떠납니다. 떠나기 전 남은 꿀을 거의 다 먹어치우기 때문에 집에 남게 될 벌들의 목숨이 위험하게 됩니다. 또한 두 새끼 여왕벌의 싸움 과정에서 집의 위치가 노출되어 말벌 등의 공격을 받아 집단 전체가 전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답니다.


목숨을 건 싸움이 결국에는 더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신기하면서도 무섭기까지 합니다.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곤충 혹은 동물이 바로 꿀벌이라네요? 그 귀여운 생김새도 그렇고, 우선 인간들에게 귀중한 것을 주잖아요? 그들의 무리 생활 이면에 이런 무서운 현실이 있었다는 것이 많이 놀라운 이유입니다. 형제 살해도, 또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꿀의 채집 행위도 그들에게는 그저 본능의 지시에 의한 엄숙하고도 필수적인 삶의 한 과정인 것이지요. 제가 이 시를 처음 읽고, 이 시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보면서 아 이건 좀 다루어봐야 하겠구나 생각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저 달콤한 꿀 좀 더 먹어볼까, 그런 속세적인 욕심이 낳은 결과는 아닙니다. 꿀벌의 죽음을 그리 몰고 가는 것은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과 그에 따른 의무에 참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그러다가 저리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아니면 '순직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사자나 호랑이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들의 그런 행위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꿀벌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저 자기 배 채우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네, 자신도 먹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을 나중을 위해, 그리고 무리 전체를 위해 집에 돌아와 저장해 둡니다. 그것이 그들이 태어나 평생 하는 일입니다, 일벌들의 책무입니다.


내 것은 당연 나의 것이고 때로는 남의 것 또한 내 것인, 그리 되기를 탐욕하는 인간들의 행위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꿀벌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욕심, 탐욕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뿐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와 마당 정원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벌에 쏘인 적이 있습니다. 둘째 손가락 끝부분에 박힌 벌의 침이 살아서 움직이며 계속해서 제 살을 파고 드는 것을, 울면서도 끝까지 지켜본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와서 침을 빼주셨지요.


저를 쏜 그 벌은 곧 죽는 것 아시지요? 벌들의 침이 내장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누군가에 자신의 침을 꽂아 넣는다는 것은 곧 자신도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벌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알면서도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향해 자신의 침을 쏠까요? 그럴 겁니다, 아마도.


이제 시를 보겠습니다.


소설가 박경리님의 귀한 시입니다. 헤르만 헤세, 빅토르 위고, 이반 투르게네프, 그리고 여기 박경리님, 소설을 주로 쓰는 분들의 시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는 어렴풋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달콤한 가을의 대추 홍조, 잘 익어 떨어진 대추, 줍고 보니 꿀벌 한 마리가 머리를 박고 있네? 애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바로 여기구나. 우리 인간들처럼 그저 단맛에 끌려 죽을 것도 모르고 그리 달려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럼 무엇이었을까?


유난히 과육이 무른 대추였을까? 그래서 미처 뒤로 빠질 틈도 없이 그렇게 한순간 푹 깊게 박히고 만 것일까? 꿀이 급한 무리의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그 벌로서는 분명 자주 하는 익숙한 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신참이었나?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눈이 시릴 만큼 높고 파란 가을의 하늘, 저리도 곱고 아름답기만 한 가을의 풍경인데, 지금 내가 주워든 내 손 위의 대추 한 알이 보여주는 것이라니!


우리네 삶이든 벌의 삶이든 그저 모두 결국은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구나! 그런 삶, 우리는 왜 그리 아등바등 사나? 벌들은 왜 또 그리 열심히 꽃을 찾아다니나? 그저 본능에 입력된 대로? 그것이 대대로 죽 이어 내려온 그들의 삶의 방식이니까? 그거 이참에 내 세대에서 한번 깨부수면 안 되나?


붉은 대추와 그 반을 죽음으로 차지하고 있는 예쁜 꿀벌 한 마리! 문득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 '저녁 노을을 보며'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 '어쩌면 이것이 죽음일까? (Es ist etwa der Tod?)'


대추와 꿀벌

-박경리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처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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