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의리. 백무산 '연민이 아니고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뜬금없이 이 새벽 나의 머릿속에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가만, 내가 이것을 어디서 보았더라? 한참이 지나서야 톨스토이가 생각났다. 아 그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What Men Live By)'. 1885년 레프 톨스토이가 쓴 단편소설이다. 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톨스토이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쉽고 효과적으로 알려주려는 목적에서 썼다. 금쪽같은 글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엔 하느님도 없소?" 남편 시몬이 아내에게 하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구두 수선공 미하일, 사실은 대천사 미카엘. 그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읽는 나도 그냥 신이 났다. 내게도 대천사, 천사들 중의 천사 미카엘이 뭔가를 해줄 것 같은 그런 은근한 바람 속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의 놀라움과 엄숙함,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해 내가 느낀 감정은 이것이었다. 대문호 톨스토이, 그의 힘 그의 글의 무서운 힘!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대천사 미카엘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전하는 얘기다. 하느님의 뜻이다. '사람은 그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
그를 무지무지 사랑'했다'. 이제는 나이 들어 그의 젊은 시절 그 육체적 매력은 사라졌다. 그의 경제적 힘과 사회적 영향력 또한 이미 옛날 얘기다. 그에게는 그럼 지금 뭐가 남았나? 남은 것이 있기는 한가? 추억? 과거의 그 화양년화? 꽃같이 아름답고 화려했던 그 시절? 아니, 그것 말고 지금은?
그래서 '연민'이 희망이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 사전적 의미는 그렇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덜어주거나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다. 단순한 동정과는 그 근본부터 다르다. 남의 일을 그저 소극적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그리 생각한다.
나와 지난 세월을 함께 해온 내 소중한 사람의 일이다. 그러니 당연 나의 일이다. 나의 일이어야 한다. 그것이 연민이다. 화려한 많은 것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그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힘이다. 따뜻함이고 긍정이다. 함께 지금의 그의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이 연민의 힘이다. 화려하고 쾌락적이고, 어쩌면 그래서 태생적으로 한시적인 사랑과는 다른 연민의 깊은 힘이다.
물론 추억으로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추억이 소환하는 아름다웠던 시절의 그 사람, 그리고 지금의 그 사람, 단지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낸 그 차이를 우리들은 기억한다. 그리고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뜨거웠던 사랑을 대신하는 힘이 된다. 불쌍하잖아? 가슴 시리잖아? 그가 남이야? 그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았어? 아니잖아! 우리와 함께 한 시절 아니야?
평생 내 삶을 관통하는 몇 가지 경구 혹은 모토 중에 나는 맹자의 '측은지심'을 단연 앞에 둔다.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라 새기고 있다. 그것이 그저 불쌍하게만 느껴지는 마음이든, 오늘 말하고 있는 연민이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늘 마음에 두고 아낀다는 것은 그 자체 귀한 감정이다.
서로에게 그렇다. 그런 마음을 품는 자나 그런 마음을 가슴 깊이 늘 품고 살아가게 한 그 존재에게나. 역지사지, 사람의 입장 또는 운명의 바뀜은 언제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뒤바뀌는 운명과 상황은 의외로 많았다.
자만할 것도 그렇다고 늘 풀이 죽어 지낼 것만도 아니다. 오행무상승, 사시무상위, 일유단장, 월유사생이라 하지 않던가? 불/물/나무/쇠/흙 그 각자는 다른 각자에게 이기고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도 늘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꿰어차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이 자연의 이치이고, 무적의 태양 또한 그 비춤의 짧을 때와 긴 때가 있고, 달도 생겨날 때와 죽어 사라지는 때가 계속 반복된다.
하물며 미물인 우리 인간들이야? 그러니 연민이 답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그것이 있으면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네' 그런 찬송가 제목을 들은 적이 있다. 마음 든든하지 않겠나? 저기 어딘가에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늘 나를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를 본다.
이 아침 나의 깊은 묵상과 사유를 요구한다. 불감청 고소원이다, 감히 그것을 청할 정도로 용감한 나는 아니지만 내심 바라고 기대하고는 있었다.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의 그 슬픈 듯한 단아함이 궁금하다. 어디까지 무엇까지 우리는 연민할 수 있을까 궁금하고 연민의 그 멋진 활약 또한 많이 궁금하다.
그저 늘 부끄러운 듯 쭈뼛거리는 그녀가 시인은 못내 안스럽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단 한 번도 앞줄에 서는 일이 없다. 자신의 몸을, 아니 마음까지 감출 생각으로만 가득한 것 같다. 남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피할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단지 슬픔으로 보였지만 이내 내 생각이 바뀐다. 정갈함이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다. 그런 자신을, 그래야 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 여인에게는? 하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연민의 마음, 정갈하고 안으로 삼가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네 삶의 이 무거운 짐 다 어찌 지고 갈까? 너도 나도의 그 뻔뻔스러움에 이렇게나 찢어진 지금의 이 세상.
어쩌면 그런 뻔뻔함도 우리의 이 고단한 삶도, 아니 이 우주의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품는 것이 옳으려나? 그런데 그럴 수는 있으려나? 문득 그 여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그럴 수 있겠느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에 나오는 스메르자쉬야라는 여인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니 뭐 그런 조금 모자라는 듯한 사람에게? 이리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꼭 그 여인에게 묻고 싶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당신은 그럴 수 있겠어요?"
이러나저러나 연민 말고 우리를 구원할 것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겠나? 있기는 하려나?
의리라고 불러도 좋다. 사람의 도리라고 말해도 또한 좋다 (아들 녀석은 언젠가 '도리'라는 말을 했다, 내게. 내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을 하기에 딱 좋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내 아들의 사랑의 힘으로 산다. 그리고 그 귀하고 고마운 아들을 사랑하는 기쁨으로 산다. 어느 시인은 '당신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더 이상 모짜르트를 듣지 못하는 거요, 그랬다지만 내게는? 금쪽보다 귀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 시린 나의 아들을 현세 육신의 눈으로는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슬픔이오, 이리 답할 것이다. 다른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다.
오늘 아침 어느 작가님의 글에서 본 문구가 기억난다. 카잔자키스의 묘비명이라고 했다 - "나는 아무 것도 바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 카잔자키스의 묘는 그의 고향인 그리스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 성문 밖 공터에 있다. 참으로 엉성하고 허름한, 그렇게나 소박한 나무 십자가 아래 낮은 묘비에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nzantzakis), 지금으로부터 142년 전에 태어난 그리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인. 법학박사에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는 그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기억한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도 있다. 1988년 그 유명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