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결코 사과나무를 심지 않는다

- 제대로 알기, 선함과 너그러움, 철학의 힘. 정철훈 '개 같은 신념'

by 가을에 내리는 눈

고등학교 때의 교련시간이었다. 반 전체가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땡볕 아래 운동장 한가운데에 차렷 자세로 서서 벌을 받는다. 지금 같았으면 당장 부당하다 항변을 했겠지만 그때만 해도 여전히 순수하고 순진한 영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련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한다 -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자신을 알라 그러셨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모두들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어찌 할 수 없었다. 물론 더 센 벌을 받았다.


상관없다, 교련 선생님이 잠깐 착각을 하셨을 수도 있고 또 원래 그리 알고 있었다 해도 그게 뭐 대수인가? 그저 어느 한 개인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주위의 사람들에게 '지구의 종말/사과나무' 이 에피소드를 꺼내면 많은 사람들이 아 그 스피노자, 이리 말할 것이다. 이건 좀 곤란하다. 사회 전체가 이런 잘못된 지식 속에 그 오랜 시간 살고 있다는 것은. 전후좌우 맥락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한 상태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몰라도 관계는 없다, 그런데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우선 뜬금없이 스피노자가 그런 말을 꺼낼 이유가 없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아 그가 말하는 신이요?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유일신,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그 신이 아니다. 그는 신과 자연은 하나, 동일체라고 말한다. 소위 '범신론' (pantheism)의 입장을 취한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해서 존재하게 하는 그것, 그것이 신이고 그것은 바로 자연 ('능산적 자연'이라고 그는 부른다)이라고 했다. 그런 존재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 그는 그것을 '소산적 자연'이라 불렀다.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을 찾아 위로 또 그 위로 올라가다 보면 나타나는 것이 만물을 있게 한 그 자연, 바로 신이 그곳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당연 그 신 혹은 창조의 주체로서의 자연은 그들이 창조한 모든 자연의 속성을 그 안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인간을 포함하는 피조물과는 아예 처음부터 구별되는 존재, 전지전능의 존재, 자신의 분명한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주관하는 그런 존재로서의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현세에서의 삶을 중시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는 어떻게 더 잘 살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었다. 굳이 이 세계의 종말을 말할 것도 아니었고, 그 종말의 시점에도 자신은 꿋꿋하게 '자신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고 천명할 하등의 이유나 동기가 없다.


사실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그렇게 젊은 시절의 초기를 보낸 사람이다. 집안은 부자였고 자신은 아버지의 그 사업을 이어받으면 되는 존재였다. 동시에 유대교 사회에서는 촉망받는 장래 리더 1순위였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끔찍한 파문을 당한다. 기존의 유대교 리더집단이 그에게 그런 무서운 파괴적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가 그만큼 대단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그를 배신자로 본 것이다. 협박도 하고 매수작전도 펼쳤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와 몇 미터 이내로 가까이 있어서도 안 되고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사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이고, 그를 돕는 일은 같은 배신자로 규정되는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철저하게, 정말 무섭게 배척되었다.


지붕 밑 방 한 칸 겨우 얻어서 낮에는 렌즈를 갈아서 생계수단으로 삼고 남은 시간에는 철학을 했다. 어느 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종신교수직 제의가 들어온다. 대단한 자리였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무엇이든 다 해도 좋으나 기존 종교계와의 더 이상의 마찰은 일으키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 달 가까이 고심하던 그는 결국 고사한다. 내 사고의 자유, 학문의 자유, 발언의 자유가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내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그저 자유롭게 지금처럼 렌즈 가는 일로 먹고 살겠다고. 내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제일 아쉽고 안타깝고, 원통하게까지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아 그것 좀 살짝 구부리고 그 좋은 자리 차지하시지, 사람 하고는 참!'


그래서 그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고 나는 이런 소인배다. 그건 안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아쉽고 안타깝다, 평생 (그래봐야 겨우 45년) 어둡고 좁은 골방에서 유리섬유 가득한 공업용 렌즈 가는 일로 살다가 간 그의 삶이. 폐병으로 죽는다. 물론 집안에 같은 병으로 사망한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형) 렌즈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리 가루의 영향도 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파문을 당하고 20년 넘게 매일 그 일을 했으니, 좁은 방안에서.


평소 그를 아끼고 그의 재능과 성과를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후원한다. 그러나 그는 딱 자기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받았다고 한다.


영양상태 또한 뭐 그리 좋았겠나? 겨우 먹고 사는 그런 궁핍의 생활. 그럼에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일상 속에서의 철학하기를 통한 구원을 갈구하는 삶을 살았다. 그 당시 보통의 사람들보다 20년 짧게 산 것이 오히려 그가 죽은 지 거의 5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아까워하는 그런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무엇이 진정 긴 것이고 무엇이 도리어 짧은 것인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어려운 화두를 그는 내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다른 세계로 가면 먼저 가 있는 사람들 중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그 선함이 좋다. 우직할 정도의 강직함도 좋다. 결국은 구부러지지 못하고 그냥 부러져버린 그의 삶이 안타까움 속에 부럽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그렇기에 그런 존재의 필요성을 격하게 공감한다.


유대교의 배타성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교리, 다른 그룹의 존재 가능성 자체에 대한 잔인한 징벌, 이런 것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이유로 배척당한 그. 그래서 그런가 그의 사상과 철학은 지극히 개방적이다. 물론 자신의 견해는 있다. 그럼에도 그것과 다른 것의 존재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수 있다는 입장을 늘 취한다.


신/정신의 본성과 그 기원/감정의 기원과 그 본성/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 이런 형이상학적인 윤리의 영역을 수학적으로 입증한 그. 현대에 와서도 그가 쓴 '에티카' (Ethica)는 그 특이성과 독창성이 여전히 그대로 드러난다.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의 방법론에 입각해서 자신의 개념들을 '명제'와 '증명', '공리'의 단계를 거치며 통쾌하게 풀어내는 그. '기하학적인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 혹은 '신에 관하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대 합리론의 정수라는 평을 받는다. 죽기 2년 전에 완성된 대작, 1677년 그의 사후에 출판된다.


이런 사람이 아무런 인용의 표시도 없이,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버젓이 가져다가 썼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럴 가치가 있는 문구도 아니었다.


이 말은 그보다 15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다. '설사 내가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나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If I knew that tomorrow the world would go pieces, I would still plant my apple tree).


그로서는 이 말을 하는 충분한 이유나 동기가 있었다. 이 세상의 종말/최후의 심판/내세/믿음/회개... 이 말은 어떤 파괴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믿음 깊은 종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참음과 버팀, 그리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심을 끌 사안은 전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틴 루터를 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 않다. 종교개혁은 그저 뒷걸음질 치다가 얻어걸린 것으로 나는 그렇게 폄하한다. 아마 본인이 제일 많이 놀랐을 것이다. 시대적 산물이다. 당연 그 당시의 인쇄술의 발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공간적 배경이 독일이었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였다면 그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성장 배경, 가정사, 그의 이념과 주장에도 나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결코 동조하지 않는다. 그보다 26년 정도 뒤에 태어난 장 칼뱅이라는 인물에게서는 더욱 큰 이질감을 느낀다. 나는 그렇다.


오늘의 이 글은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를 위한 것이다. 루터나 칼뱅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그가 조금은 더 제대로 알려졌으면 하는 나의 작은 바람이 늘 있었다. 오늘 그 기회를 잡았다.


모르는 것은 차라리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아는 것은 위험하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어떤 특정 사안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배경, 연결의 고리를 알게 되면 그 사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고 정확할 수 있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은 우연의 도움이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함께.


이제 오늘의 시를 보아도 될 것 같다.


마치 젊은 날 심취해서 읽었던 김수영님의 시를 읽는 듯한 기쁨이 있었다. 시의 흐름이 그랬고 언어가 그러했고, 살아 숨쉬는 시인의 기개가 그랬다. 멋진 시였다. 조금은 긴 시지만 여러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시라 원시를. 역사학 박사가 쓴 이 시를.


남들처럼 세상과 섞이고 그래서 돈도 좀 잘 벌어오고, 맨날 그놈의 시 나부랭이나 붙잡고 앉아있지 말고, 이런 소리를 아내에게서 평소 자주 듣는가 보다 이 시인은. 현실로서의 생활과 작가로서의 꿈, 그 둘 사이의 괴리와 그래서 느껴야만 하는 무력감, 고뇌와 탄식을 말하고 있다.


자기가 어떻게 그리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지, 버틸 수 있는지,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그저 버틴다, 젖지 않으려고. 어떤 때는 시인 자신도 쏟아지는 빗줄기, 욕실의 샤워 물줄기에도 젖지 않는 자신이 역설적으로 밉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게 나임을 그는 안다. 그래서 여태껏 이 세상 버티며 산다는 것도 안다.


비와 샤워는 의심의 음악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심에 젖지 않으려 더욱 기를 쓴다. 아무리 비가 와도 나는 젖지 않는다, 아니 결코 젖지 않을 것이다. 어제는 아내가 참으로 강공으로 나오는 바람에 자칫하면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할 뻔했다. 그러나 견뎠다. 아내의 그 소동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일단 한번 젖는다면 그건 바로 내가 더 이상 설 곳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여보, 내가 젖는다 해도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음을 당신은 알아야 하오. 세상 또한 바뀌는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그저 나만 젖은 꼴이 되는 것이지. 내가 나의 꿈을 버린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 살림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사회가?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사실 아내가 수시로 재촉을 하고 의심을 하고, 빗줄기가 그리고 샤워의 줄물기가 나를 의심하고 몰아부쳐도 나는 뭐 딱히 고백할 것이 없어요. 감춘 것 숨긴 것 속인 것이 있어야 실토를 하든 말든 하지? 나는 그런 거 없거든? 나는 그저 나의 신념대로 사는 것 뿐. 치열하고도 고집스러운 삶에 대한 나의 자세, 내 방식.


여보, 당신이 엊저녁 그 난리 후 오늘 아침부터 뜨겁게 하고 있는 샤워, 지금 맞고 있는 그 물줄기가 바로 당신이 그리도 찾고 있는 그 사랑이라오. 그걸 아시오 당신.


사랑? 그 물줄기 같은 사랑! 여보, 사랑은 그런 거야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렇게 물 위에 쓰는 것이 사랑이라오. 정 그러면 여보 내게 한번 물어봐 주시오, '물 위에 쓰는 사랑'이 도대체 뭐냐고. 내 이리 답을 할 것이오 -


그저 쉽게 지나가는, 그렇게 일시적인, 그것도 아니라면 실현 불가능한, 이룰 수 없는 헛된 사랑 그것이 내가 말하는 물 위에 쓰는 사랑이라고.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당신이 그리 원하는 내가 젖는 것 또한 결국은 그렇다고. 그러니 나라도 만족할 수 있게, 그저 내 개똥철학을 따라 그렇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외롭고 가난한 시인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무지막지한 생활과 일상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나'를 당신만이라도 그냥 따뜻한 눈으로 보아달라고.


# '개 같은 신념' - 이런 제목을 붙인 시인의 진정한 뜻은? 이 사회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상스러운 의미, 그것 또한 아니다. 그만큼 끈질기게, 일상의 고단함과 고뇌 속에서도 절대 잃지 않으려는 삶에 대한 치열한 의지와 자기 성찰을 표현하고자 한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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