쫒는 자와 쫒기는 자, 어느새 우리는 그 둘 다인가?

- 쫓으면 결국 쫓기게 된다. 불확실성의 공포. 이상 '오감도'

by 가을에 내리는 눈

언제부터인가 길을 걸을 때는 앞 사람과의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특히 앞에 가는 사람이 여성일 경우에는. 누군가 내 뒤에서 아니면 옆에서 바짝 붙어 걸으면 왠지 불안하고 불편하다, 나는 그렇다. 그러면 다른 사람 또한 그리 느끼지 않겠나? 혹시 앞질러서 가야할 경우는 충분히 공간을 두고 타원형으로 옆으로 휘어 돌아서 간다.


나를 쫓는 그 누군가가 비난받아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쫓기는 내가 욕을 먹어야 할까?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셨다.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걸 잃어버린 사람이 더 나쁘다고. 괜시리 그 사람까지 도둑이 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평소 늘 자기 물건 관리 잘하라고. 방심하지 말고 유혹의 여지를 주지 말라고. 견물생심의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나를 밀어붙이고 몰아붙이고 그렇게 내 걸음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게 만드는 사람이 나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는 해도,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나를 따라오는 밤길의 어느 남자처럼 아무튼 그는 나에게 불안감을 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내가 괜히 그리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나친 불안감 혹은 노파심일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전혀 불을 지피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없다. 자연발화가 아니고서야. 그런데 아궁이에서 어떻게 자연발화가 되나? 번개가 불씨가 될 일도 없고. 분명 원인이 되는 그 무엇인가는 존재한다. 애초 내가 어떤 단초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무심코 그를 화나게 했거나 그의 경쟁심을 부추겼거나, 오만하게 그를 깔보는 말이나 행동을 했거나.


지금 오늘의 이 글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내 의도대로 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 제대로 가고 있다. 오늘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저지른 말이나 행동이든, 공연히 타인을 자극하는 일은 하지 말자. 늘 조심하고 경계하자 그 위험성에 대해. 자칫 내가 남을 쫓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당하는 그에게는 큰 부담이고 압박일 것이다.


사람을 쫓는 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쫓는 일 또한 삼가자. '완인상덕, 완물상지'라 했다. 어떤 사람에게 크게 빠지면 결국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잃게 되고, 물건에 심하게 빠지면 그 물건 자체의 본래의 효용 또는 존재 이유를 망각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뜻이다. 쫓는 행위의 위험성과도 연결된다.


왜 쫓는가? 해를 가하기 위해서? 백주대낮에 감히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살짝 겁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그를 손에 넣기 위해? 그런 식으로 사람이 나의 것이 되나? 물건을 쫓고 부를 쫓고 명예를 쫓는 일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형의 그 무엇이든, 굳이 쫓지는 말자. 그 목적이 무엇이든!


혹여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우선 한번 제대로 살펴보자. 정말 그런 상황인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의 상태라면 그 원인을 파악하자. 내가 자초한 것인지 나와는 상관없이 100% 전적으로 그의 선택과 실행인지. 내가 자초한 것이라면 벗어날 방법을 빨리 찾자. 그것이 사과의 형태일 수도 있고 밤에도 늘 열어놓던 그 문을 닫는 방식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당장 치유의 조치를 취하자.


아무리 객관적으로 살피고 분석을 해도 내 잘못은 아닌 것 같다면 사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에게 해법이 있기 때문이다. 정공법을 쓰자. 그에게 직접 말하자, 충분히 공손하게 단둘이 있을 때 그가 기분 나쁘지 않게 신경을 써서. 나의 현재의 상태를 그가 알게 하자. 부담스럽다고, 많이 힘들다고,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고.


그러나 예의 속에서도 나의 단호함은 꼭 필요하다. 그가 나의 다음 행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잘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리 바라지만, 만일 나아지지 않는다면 다른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나는 이미 하고 있음을. 단, 절대 협박으로 비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뻥 카드는 더욱 금물이다. 절실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단호함과 절박함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그러셨다. 열 대를 맞더라도 단 한 대라도 꼭 받아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오늘은 코피가 나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하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상대방은 오늘 너에게 맞은 그 뜻밖의 한 대를 기억할 것이라고. 그리고 조만간 다른 상대를 찾아서 옮겨갈 것이라고. 그러니 첫 대결에서의 너의 반응이 제일 중요하다고. 너의 대응이 그 다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두 번 기회는 없다고. 오직 그 첫 번째 대결이 게임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그러니 꼭 한 대는 치라고! 고마운 나의 아버지! 늘 그리운 분!


이제 저와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은 앞으로 공연히, 특별한 이유없이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그 사람에게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쫓고 있는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행위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역지사지의 지혜.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전히 누군가의 뒤를 쫓는 자가 되어있고 그렇게 타인에게 불안감을 주는 부정적 존재가 되어있을 수 있다. 앞 사람과의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고 걸으려는 노력처럼, 혹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런 해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항상 조심하고 살피자. 그러면 된다.


누가 나를 쫓고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쫓는 것이라고? 그건 비겁한 핑계다. 내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과 내가 누군가를 쫓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예 차원이 다르다고 말해도 좋다. 하나는 나의 통제 밖에 있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내 영역 안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그건 더 비겁한 핑계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다. 내가 결정했고 내가 실행하는 일이다. 나를 합리화할 구석은 없다. 물건을 쫓는 우행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사람을 쫓는 경우와 정확히 동일한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논리, 상황의 논리 이런 것들이 사실은 제일 비겁한 변명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같은 시대 같은 사회 같은 상황 속에 살아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고 굳이 저렇게 하는 자가 있다. 그들 각자의 선택이요 전략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제 시를 본다 (오감도 중 시 제 1호).


'오감도', 까마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 위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이다. 원래는 조감도였는데 인쇄소 식자공이 살짝 잘못 읽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보다 큰 그림을 본다는 뜻에서는 동일하다.


참으로 잘 생긴 한국의 시인들 중에 나는 꼭 이상을 꼽는다. 물론 백석 시인도 엄청 잘 생겼다. 시인 김수영님도 멋지게 생긴 분이다. 이상 하면 나는 그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씨가 떠오른다. 수필가이자 화가인 그분, 참으로 멋진 여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동경에서 이상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도 그분이다. 후일 한국의 유명한 화가 한 분의 탄생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대단한 분이다.


누가 누구를 쫓고 있는 것인지, 쫓는 것인지 쫓기는 것인지 내달리는 아이들은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향한다. 지금 왜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알고는 있을까? 무서워 하는 아이도 있고 그 아이들을 무섭게 만드는 아이도 있다. 딱 그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 중간은 없다. 과연 누가 무서운 아이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인지는 차라리 중요하지 않다고 시인은 말한다.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이 도로이든 아니든 막다른 골목이든 뚫린 길이든 그것 또한 상관없단다. 그럼 정작 뭐가 중요한 것일까? 시인은 그러나 나중에는 앞서 말한 것들과는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음을 내비친다. 그게 뭘까? 다른 사정이란 것이? 제 3의 존재?


정말 무서운 것은 아이들 그 누구도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인지, 무서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13명 중에 도대체 몇 명이 무서운 아이인지도 모른다. 분명 무서운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기는 하다. 그러니 아이들이 무서워서 달리는 것 아닌가? 자기가 앞의 아이를 쫓고 있는 듯해도 사실은 자기를 뒤쫓아오는 아이를 피해 달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뒤의 아이 또한 마찬가지다. 일부러 나를 쫓는 것이 아니고 자기 뒤에서 자기를 쫓아오는 그 무서운 아이를 피해 그저 달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 자체와 그때의 상황과 배경,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 애매하고 불명확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불확실성 그리고 불확정성이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 단지 그때 시인이 처한 시대적 불확실성일까 아니면 시인 자신의 불확실성일까, 내면과 실상의? 둘 다일까?


어려운 시다. 그래서 흥미로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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