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밭, 이승과 저승, 영생

- 결국은 같은 무게, 같은 줄기. 딜런 토머스 '푸른색 뇌관이~'

by 가을에 내리는 눈

불행한 삶을 살다가 간 프랑스의 시인 아트튀르 랭보는 37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가 쓴 그 아름다운 시들은 모두 그의 나이 16세 - 21세 사이, 불과 5년 동안 쓴 것이다. 그 후 그는 시 쓰는 일을 완전히 접고 그저 여행을 하며 살았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그곳을 토대로 커피 무역을 했다. 사망시 무연고자로 취급받을 정도로 거의 객사했다고 보면 된다.


시 '오감도', 소설 '날개'로 잘 알려진 시인 이상은 참으로 아까운 27세의 나이에 일본 동경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그때 그의 곁에서는 아내 변동림씨가 마지막 순간의 그를 지켜보았다. 천재의 요절이다, 그는 정말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는 31세의 나이에 질병으로 다른 세상으로 갔다. 죽기 1년 전에야 비로소 자신의 피아노를 처음으로 갖게 될 만큼 가난 속에 살았던 음악가. 정작 그를 그런 비참한 질병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은 80이 넘도록 살았다.


유명한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는 한창 잘 나가던 시기,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35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부르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유명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버전조차도 쉽사리 넘어서기 어려운 명반이다.


아일랜드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52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74세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85세까지 장수했다. 죽기 1년 전 유명한 성악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권옥연님은 함경도 최고 부잣집의 귀한 독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독자였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호랑이 육포를 구해다가 먹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그런가 88세까지 사셨다. 하긴 '현대 첼로 연주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7세까지 살았다. 죽기 직전까지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다.


장거리 해외행 비행기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는 사람, 아니 퍼스트 클래스를 타는 사람, 나 처럼 그냥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는 사람, 뭐 이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사실 달리 어찌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돈을 내면 당장 10년 더 살 수 있는 티켓을 준다거나 더 많은 돈을 내면 20년 더 사는 표를 준다거나, 엄청 많은 돈을 내면 영생을 살 수도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이 세계는 금새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이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현세 사람들에 의한 현실적 폭동이나 메가 혁명에 의한 사실상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도저히 눈뜨고 보아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려하던 대로 돈으로 사람의 수명까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방식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이기고 물리치고 하는 단계가 아니라 결국 그렇게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탄생은 동시가 아니었으나 사망은 동시가 되는, 그런 옛날 유행했던 공상과학영화 속의 장면처럼 그렇게.


생과 사, 사람의 수명의 문제는 그렇게 민감한 이슈다. 적어도 그 영역에서만큼은 그 어떤 형태의 양보나 타협도 없다.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것만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고 그렇게.


그래서일까? 신이 아니 자연이 우리 인간 세계에 한 많은 것들 중에 유일하게 선한, 정말로 공평한 것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결국은 죽는다는 것,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 대체로 거의 비슷한 나이까지 살다가 그 끝을 맞는다는 것. 계급도 계층도, 돈도 권력도, 잘생기고 못 생기고를 불문하고 그렇게 똑같이.


'흥, 그래? 그러셔?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당신도 나이 들고, 주름지게 흉하게 늙어가고 그러다가 죽어!' 어쩌면 이 사실 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정의 혹은 최후의 형평성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는 빈부의 격차, 왜곡된 정의, 공평과 형평의 부존재, 지배하는 자와 그 지배를 받는 자, 이 모든 것들을 참고 견디고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는 낫다', 나 어릴 적 어머니가 가끔 내게 하신 말씀이다. 왜 그런 말을 그때 내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는 사실 이승에만 계셨었는데, 그 둘의 차이를 어떻게 비교분석하고 그런 결론을 내신 것일까? 지금은 두 곳 다 경험 하셨으니 나름의 사실적 주관적 판단을 갖고 계실 것인데?


후일 내가 그곳에 가야 비로소 직접 들을 수 있는 얘기이니 지금은 별 소용이 없구먼? 아무튼 아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승을 떠나고 싶어서 일부러 떠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


그러니 이곳이 더 좋다 저곳이 더 좋다, 그런 논의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태어났듯이 그저 가는 것이니까, 그것이 우리네 삶이니까.


이승이라고 굳이 개똥밭에 구르라는 법은 애초 없는 것이고, 저승은 그때 그곳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되는 일이고. 지금 미리 뭘 한다고 가점을 줄 것도 아닌 바에야. 영생? 글쎄 그게 꼭 좋은 것일지는 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 가능성의 문제는 저 멀리 뒤로 밀쳐놓더라도.


그러니 결론은? 지금 있는 이곳에서 그저 나의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수밖에. 어떻게? 어차피 시계의 초침은 째깍째깍 흘러가는 것, 가급적 즐겁게/신나게/달콤하게/기분 좋게/늘 편안한 마음으로/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온 속에/두려움 없이/미련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끝에 대한 염려나 공포, 그로 인한 지레 겁먹고 도망가기는 없이 그렇게. 참으로 당당하게/우아하게/고고하게/조금은 오만하고 도도하게, 우리네 삶의 그 끝에 대해서 그렇게!


오늘의 시를 본다.


18세의 나이에 쓴 시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사용하고 있는 상징과 은유, 비유 (메타포, metaphor)가 다양하고 기발하다. 폭발 장치에 쓰이는 '뇌관' (퓨즈, fuse)이 그렇고 '꽃'이 그렇고 '초록빛깔 나이'가 그렇다. '굽은 장미'/'굽은 벌레'/'굳은 피와 아픈 상처'/'같은 입의 전혀 다른 두 얼굴'이 그렇다.


결국 하나의 동일한 힘 혹은 기세가 정반대로 다른 두 현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 삶과 죽음, 꽃이 피게 하고 또 다음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뿌리까지 시들어 죽게 하고, 우리 몸에 피를 흐르게 하다가 그러나 또 언젠가는 그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된다 이미 충분히 흘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같은 힘 또는 에너지, 원동력에 의해 일어난다.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가만 들여다 보면 그게 이치에 맞다. 과학적으로도 그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한 것이 다음번에는 전혀 다른 반응과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니 그 양면성 또는 전혀 상반되는 현상이나 결과의 도래를 늘 예상하는 것이 충격이나 허망함을 더는 길이 될 것이다, 시인은 은연중에 그리 말한다.


우주 대자연의 그 오묘한 현상을, 인간 내가 뭐라고 설명하겠나? 입은 있지만 뭐 딱히 할 말이 없다, 마치 말 못 하는 사람인 듯 그렇게. 놀라움/신비감/오묘함에 그저 말문이 막히고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덤 dumb, 선천적으로 말할 능력이 없는/너무 놀라서 말을 할 힘을 잃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내게 이 시를 단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그래서 '덤, dumb'이다. 그러니 그저 놀라고, 한번 더 크게 놀라고, 가끔은 당황하고, 당혹감에 주춤하고, 그러다가 이해를 하고 그렇게 수용하는 수밖에. 생과 사, 탄생과 소멸, 흥함과 쇠함, 시작과 끝 이 모든 것이 그렇다. 그냥 놀라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말없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푸른색 뇌관을 통해 꽃을 움직이고 몰아가는 미지의 힘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

- 딜런 토머스 (Dylan Thomas)

푸른색 기폭장치를 통해 꽃을 운전하고 몰아가는 그 힘의 기세가 나의 젊은 시절을 몰고 간다 ; 나무의 뿌리를 손상하고 시들게 한다,

그러니 결국 그것은 나를 파괴하는 자다.

시들어 굽은 장미에게 나는 아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 젊음 또한 그와 동일한 겨울날씨 같은 불안정 속에 뒤틀리고 구부러진다.


바위들 사이로 물을 흐르게 하는 그 힘이 나의 붉은 피를 움직인다 ; 흐르는 강물을 마르게 한다,

그렇게 내 피를 굳게 만든다.

나는 내 혈관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저 산 위의 샘에서는 많은 것을 내어주던 그 샘의 입이 어떻게 이제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것인지.


물웅덩이에서 물을 저어 소용돌이 치게 하는 그 손이 또한 모래함정을 휘저어 움직이게 한다 ; 불어오는 바람을 붙들어 맨다

그렇게 내 돛을 끌어당겨 그 방향을 바꾼다.

부식된 내 육체가 어떻게 교수형 집행인이 사용하는 생석회를 만드는데 쓰이는지 나는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저 할 말을 잃는다.


시간의 무서운 입은 샘의 원천에 달라붙어 그 피를 빤다 ;

사랑은 넘쳐흐르고 점점 더 커진다,

하지만 굳은 피는 그녀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한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별들 주위에 저 하늘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 나는 세월의 바람에게

달리 뭐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에게 어떻게 내 수의에 그런 굽은 벌레가 기어다니는지

아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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