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벽 실내 온도 17.9도, 그 상대성

- 상대론적 대응, 같은 현상 다른 의미. 이해인 '겨울 편지'

by 가을에 내리는 눈

예전에 겨울철 서울 아파트에서는 마치 여름인 듯 반팔을 입고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러려나?


그 시절 가끔 뉴스를 보면 겨울철 적정 실내 온도는 21도라는 공익성 멘트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아니 21도면 추워서 어떻게 지내라고? 한번 경험하기는 하고 하는 말인가? 그리 역정을 냈다. 나는 23도가 딱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춥다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집 아파트 겨울철 실내 온도는 늘 24도로 맞추어져 있었다.


러시아 인근 작은 나라의 겨울은 매섭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사람의 뼈를 파고 든다. 거기다가 수시로 찾아오는 강풍, 무려 초속 14미터, 거의 폭풍주의보 수준이다. 밖에 나가면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고 바람에 몸이 심한 저항감을 느낀다. 밤에는 그 바람이 질러대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오래된 통상의 그들 주택에는 난방시설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에어비앤비에서는 벽을 뚫고 '카르마'라고 부르는, 가스를 이용해 열을 내는 조악한 시설을 설치한다. 그래도 그 덕으로 외국인들은 겨울을 버틴다. 밤새 카르마를 틀어놓은 상태에서 맞는 새벽의 실내 온도는 20.7도였다. 많이 쌀쌀하다.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싫어지는 그런 찬 기온이다.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는 더운 나라다. 그런데 내가 있는 이곳은 고산지대라 여름이 없다. 늘 봄과 같은 날씨다. 그런 이곳에도 겨울은 있다. 눈은 오지 않지만, 영하로 내려가는 기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에게는 겨울이다. 물론 난방시설은 전혀 없다. 우선 바람의 세기가 달라진다.


평소 이곳은 센 바람이 거의 없다. 그저 부드럽고 달콤한, 한국의 예전 초여름의 산들바람, 브리즈 (breeze)다. 그런데 11월의 중순부터 겨울이 되면 그 바람이 실어나르는 공기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나를 기준으로 한다면 살짝 찬 기운을 느끼는 정도? 해가 지고 밤이 되고 새벽이 되면 온도는 더욱 내려간다. 오늘 아침 새벽 내 방의 온도는 섭씨 17.9도였다. 충분히 찬 온도다. 과거의 24도, 20.7도 그리고 이제는 17.9도, 서로 다른 세 경우의 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엄청 추워서 몸을 움추리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왜일까? 분명히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인 개념으로나 낮은 온도인데? 아,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다르구나!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결코 입을 일이 없는 '플리스 집업' 트레이닝 셔츠를 윗옷으로 입고 있다. 한국에서 입었던 실크 잠옷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일어나자마자 셔츠의 맨 윗단추도 서둘러 채운다.


이곳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일찌감치 털 달린 모자를 쓰고 두툼한 파카를 입었다. 나는 아침 저녁 산책 때 여전히 봄가을의 가벼운 옷차림이다. 아침 저녁은 이렇게 찬 기운을 느껴도 낮은 여전히 뜨겁고 강한 햇볕이다. 나는 우산을 양산 삼아 쓰고 다닌다. 그래도 이들은 겨울의 추위를 느낀다.


그 옛날 홍콩이 인기 있던 시절, 영상의 기온에서 밍크 코트를 입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경우와 같다. 하지만 '그들이' 겨울로 느끼면 그게 바로 겨울이다. 그래서 '체감온도'라는 용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17.9도는 그래도 여전히 괜찮은 겨울 온도라는 느낌을 갖는 사람, 반면에 이건 사람 사는 실내 온도가 아니라고 경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지금껏 아니면 조금 전까지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가 그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결국 '상대성'이다.


차라리 순하고 단순한 절대성은 그나마 편하다. 예측이 가능하고 그러니 내가 쉽게 대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대성이란 놈은 도무지 어찌 변할지 내가 알아낼 재간이 없다. 변화무쌍, 천의 얼굴, 좋게 말하면 융통성 혹은 다양성, 아니면 기회 또는 변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Relativity)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주워들은 것을 살짝, 어설프게 원용을 하면 이렇다 - 물리법칙의 절대성, 하지만 그 법칙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좌표계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 그는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파고든 것이다. 예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이전에 내가 있던 공간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 이 두 가지 변수의 다양한 조합에 따라 동일한 물리현상 또는 법칙은 전혀 다른 모습을 내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삶의 어려움의 이유다.


물의 흐름에 내 몸을 그냥 맡기고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올라타듯, 나 또한 그런 유연한, 아니 좀 더 유식하게 말한다면 상대론적인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이이제이'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적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을 물리친다) 혹은 '이열치열' (뜨거움으로 뜨거움을 이겨낸다, 여름철 삼계탕 같은)의 지혜다.


또 하나, 상황에 맞게 적극 대처하면 된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는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오리털 이불을 덮고 잔다, 또 가능한 경우라면 '드롱기' (Delonghi) 라디에이터식 이동 난방기를 옆에 둔다. 잘 먹고 잘 자는 일상을 통해 살을 조금 찌운다, 그렇게 지방층을 살짝 두텁게 한다. 물론 나처럼 충분히 그 공간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말이다. 요 몇 달 볼에 살이 조금 올랐다. 산책 때의 걷는 자세가 우선 달라지고 추위에 대한 느낌도 많이 다르다. 지방층의 힘이다, 근육의 도움이다.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눈처럼 하얀 분이 쓰신 새하얀 시다.


겨울 편지

-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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