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세계, 합리적 회의. 딜런 토머스 '내가 인간 세계의~'
뜬금없이, 이런 발칙한 질문을 석가모니불에게 하고 싶다. 왜 하필 그에게? 하나, 그는 예수보다 500년이나 먼저 태어난 분이니까, 그러니 그 이후의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니까. 둘, 그분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니까. 물론 그 깨달음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상 만물과 이치에 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지혜의 눈을 가진 분에게서 듣는 답은 뭔가 많이 다를 것이니까. 그래서 제 질문은?
"예수님이 골로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순간순간 그는 인간의 정신, 사람의 의식으로 그 모든 것을 견뎌낸 것일까요 아니면 신성의 존재와 의식으로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제 나름의 답과 결론은 이미 제게 있습니다. 지난 세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혹은 궁금함이었거든요.
밥 딜런 (Bob Dylan)만큼 부와 명예를 다 누린 가수는 없을 듯하다. 미국 정부의 역대 대통령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은 거의 다 받았다. 비문학인으로는 드물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짐머맨이다.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시를 너무도 좋아해서 가수로서의 이름을 아예 밥 딜런으로 바꾸었다는 말도 있다. 영국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불평을 한단다 - '아니 밥 딜런에게는 노벨상을 주면서 정작 딜런 토머스에게는 왜 안 주는 거야?'
나는 예전부터 노벨상은 정치 역학적 구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자신을 놓았다고 그렇게 보는 사람이다. 힘과 권력, 그때그때의 정치적 필요성 뭐 이런 것들의 복합이 많이 작용하지 않나, 그저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무튼 딜런 토머스 (Dylan Marlais Thomas)는 '그래서' 노벨상으로부터는 일찌감치 멀어진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17세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둔다. 제도적 교육의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란스럽고 늘 술에 취해있고 불운한 시인', 그에 대한 이런 평도 있다.
아버지는 반종교적 무신론자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안타깝게도 39세의 나이에 다른 세상으로 갔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웨일즈의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리드미컬하고 독창적인 단어와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말 그랬다, 그의 시 몇 개를 읽고 번역해 보니까.
이제 그의 시를 본다. 그저 '놀라운, 경이로운' 시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오래 살았고 지금껏 많은 것을 읽었고 많은 경험을 했고, 더구나 시를 많이 좋아하는 내가, 이런 시를 만난 적은 없다. 번역에 여러 날이 걸렸다. 나의 정성을 다했다. 그만큼 성스럽고 고귀한 시였기 때문이다.
첫째, 시 안에 또 다른 시가 있고 얽힌 스토리가 있었다. '누구누구의 딸의 브라더이고 또 죽음을 낳는 존재의 시스터'이고, 이런 시구의 연속이다. 공부를 해야했다, 배경 지식을 알아야만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이 시는 내게 겨우 한 줄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을 허여했다.
둘, 상징과 은유가 참으로 많은 시다. 돌리고 또 한번 다시 돌리고, 이리 엮고 저리 엮고, 지식이 일천하고 영어에 그리 능통하지 못한 나로서는 난감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평소의 묵상과 사유가 나를 도왔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셋, 내가 처음 접하는, 그래서 그만큼 신선하고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와 접근법을 시인은 취하고 있다.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 그분은 과연 사람인 어머니의 몸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출산의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는가를, 그리스도 그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다. 여기서는 시인이 바로 그리스도 그다. 태어나기 전 그리스도 그가 알고 있었던 것, 느껴야만 했던 것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넷, 그 표현법에 있어서 참으로 진기한 시다. 읽는 내가 마치 지금 환상 속에 있는 듯한 그런 환상적인 서술과 묘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성경을 처음 읽었던 순간보다 (내가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욥기'였다) 나는 이 시 한 편에서 더 큰 떨림을 느꼈다.
신의 존재, 영생, 인간이라는 존재, 결국은 죽어야 하는 존재, 신성과 신비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이 현세, 죽음과 소멸 그리고 쇠락의 엄연한 현실...
다가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 그로 인한 고통, 자신을 보낸 분의 뜻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약간의 서운함, 신성과 인간의 육체, 생생하게 자신의 미래를 보는 그 과정이 가져오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탄생과 함께 소멸, 그 속에서의 고통을 동시에 주는 신의 심오한 뜻과 메시지, 그런 신성에 대한 연민과 동정,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시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덴마크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쇠얀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했다. 아들이 목회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아버지, 본인도 목자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평생 깊은 믿음 속에 살았던 실존주의 철학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
"매 순간 회의하지 않는 믿음, 그렇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바람직한 답을 얻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강화해 나가지 않는 믿음 혹은 신앙이란, 그냥 미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브런치의 귀한 가족분들에게 내가 이 시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내가 인간 세계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Before I Knocked)
- 딜런 토머스 (Dylan Thomas)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저 아직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형태의 두 손으로 어머니의 자궁 벽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던 그때에,
나의 집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을#1 이루고 있는 물처럼 그렇게 형태가 없는 존재이던 나는
그럼에도 이미 그때 인간의 속성을 띠고 있었고#2
그렇기에 결국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봄과 여름을 알지 못했고,
태양 그리고 달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육체라는 나의 갑옷 아래에서 나는 뭔가 쿵쿵 울리는 소리를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저 용해된 형태로 있었고
내 아버지가 그의 둥근 하늘에서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활기없고 무거운 별들, 혹은 비에 젖은 해머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나는 겨울이 보내는 메시지를 알고 있었고,
화살처럼 날아드는 우박, 어린아이 같은 눈,
그리고 바람 이 모든 것들은 나와 이미 아는 사이였다 ;
내 안의 바람은 뛰어오르며 급하게 움직였다, 마치 지옥에서 태어난 이슬처럼 ;
내 혈관에는 동방의 기후가 들어와 흐르고 있었다 ;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는 그럼에도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큰 고통을 받았다 ;
앞으로 내게 닥쳐올 일들에 대한 생각이 가져오는 극심한 고통은
나의 연약한 뼈들을 마구 비틀고 쥐어짰다 너는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을 것이다라고
상세히 그려져 있는 생생한 암호 코드를 통해서,
또한 내 살들을 싹둑싹둑 잘라서 나의 간에는 죽음의 십자가를,
그리고 내 머리를 고통스럽게 할 가시나무를 새겨넣었다.
그곳, 말과 물이#3 곧 다가올 출산 때까지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섞여있는 자궁에서는
그 어떤 피부 조직이나 혈관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나의 목은 이미 갈증을 알고 있었다 ;
나의 마음은 사랑을 알고 있었고, 내 배는 배고픔을 알았다 ;
내 변기에서 나는 구더기의 냄새를 맡았다.#4
그리고 시간은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의 나를 이 세상으로 밀어냈다
세상의 바다 이곳저곳을 표류하거나 아니면 익사하도록 그렇게
그것이 결코 해안에는 닿지 못하는
조수의 고통스러운 모험이자 시도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귀한 존재였던 나를 더욱 더 귀중한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의 세계에서 조금씩 조금씩 아주 여러 날 삶과 죽음의 포도주를 마시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인간의 육체와 성스러운 영혼을 함께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성령도 아니었고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결국은 죽어야 하는 그런 망자의 혼이었다.
죽음의 깃털은 순식간에 그리고 아주 가볍게 나를 때려눕혔다.
나는 참으로 길었던 그 마지막 숨의 순간까지 어쨌든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에게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 마지막 나의 호흡.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제단에서 절하고 경배하는 그대들이여,
나를 기억하라 그리고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라
나의 신성을 감추는 갑옷으로서 내 살과 뼈를 택하신 그분을
그리고 내 어머니의 자궁을 속인#5 바로 그분을 부디 불쌍히 여기라.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1 - 나사렛 동편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 겨우 50 - 60킬로 정도의 거리.
#2 - 다른 시인의 시에 나오는 인물들을 빌려와서 자신은 그때 이미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그래서 결국은 죽어야 하는 존재였음을 말하고 있다. 돌고 돌아 온 이 결론을 나는 그냥 의역했다.
#3 - '미래의 언어 및 의식을 담당할 인간으로서의 여러 기관들과 양수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그저 혼재하고 있다 (Where words and water make a mixture)'.
#4 - 자신에게 다가올 고통, 죽음, 소멸의 전조를 암시하는 말이다.
#5 - 'doublecrossed my mother's womb' 인간들의 정상적인 잉태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그렇게 수태하게 한, 뭐 그런 정도의 의미다. 사람 몸의 기관으로서는 속임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하지만 또 다른 해석으로는 하늘의 그분께서 나의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의 자궁에 대해 두 번 축복의 '성호를 그었다 (cross)'로 보기도 한다. 신성한 존재의 탄생을 위한 잉태에 대해, 그리고 결국에는 죽게 될 그의 운명에 대해.
영시의 한글 번역본상으로는 절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시의 운율/리듬/동음이 가져오는 은유와 묘미 등인데, 시인은 사실 머릿속으로는 단순히 '십자가 (cross)'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보았다. 두 번의 십자가? 33년 - 35년 동안 그 긴 세월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늘 가슴에, 현실 속에 담고 살아가야 했던 '한 존재' (인간으로서든 신성의 존재로서든 둘 다 공히)의 그 일상 속 십자가. 그리고 힘겹게 고통 속에 골고다 언덕을 지고 오르는, 그리고 끝내 거기에 못박혀 죽는 그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