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내 안에 있는 사람, 영혼의 향기, 영원의. 나태주 '아내'
정말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에게 나의 필이 꽂힌다. 훅 하고 내게로 들어온다. 이 순간에는 그 어떤 논리나 이성이나 지성도 나를 제어하지 못한다. 인간의 감정과 열정, 충동이 무서운 이유다. 그것이 남녀간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와인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 와인을 마시는 와인 잔이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와인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슈피겔라우라는 오스트리아 크리스탈 잔을 애용한다.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빌스베르거 버건디 잔 하나, 그리고 그랑빨레 엑스퀴짓드 보르도 잔 하나, 이렇게 잔 두 개는 꼭 들고 다닌다. 물론 핸드 캐리로, 조심조심. 기계로 똑같이 찍어내는 버전도 있지만 내가 쓰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탈 장인이 하나하나 입으로 불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잘 살펴보면 잔 마다 그 모양이 아주 조금씩은 다르다.
아니, 그 잔 별로 비싸지 않던데 지난번에는 왜 꽤나 값이 나간다고 그랬느냐고 내게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그냥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나오는 구절 '소이부답 심자한' (그냥 지긋이 웃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그저 편안하다)이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 서설이 긴 것이냐구요? 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꺼내려구요. 기계로 찍어내는 짚신이었다면 이거나 저거나 똑같은 것이니 굳이 짝이 있다 말을 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먼저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그 뒤에 하나씩 일일이 손으로 삼아내는 100% 수제 장인 짚신의 경우, 특정 짚신의 왼쪽발에 상응하는 원래의 오른쪽 짝은 따로 있겠지요. 같은 사이즈라도 아마 조금씩 다를 겁니다.
짚신도 짝이 있는 마당에 하물며 우리 인간들에게야! 순간적으로 눈이 맞고 필이 오고, 이게 원시적이고 그저 우연의 산물인 듯해도 어찌 보면 그 시스템 안에 묘한 신비와 정교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미 오래전 어엿한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잡은 만남 주선 서비스가 당해내지 못하는 성사율 혹은 성공률을 바로 그런 본능적 매칭 스킴이 보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 지금까지!
아내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네요. 그저 고마운 이름이지요. 듣기만 해도 신이 나고 가슴이 뛰고, 저기 어딘가에 있는 내 편이 금새 그리워지지요. 그런 아내에게서 나는 향기, 그러니 얼마나 향기롭겠어요? 뭐 어디 내로라하는 향수 감히 명함이나 내밀겠어요?
그것 아세요? 단지 향을 맡아보기 위해 종이에 뿌려지는 향수의 향과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살에, 옷에 뿌려졌을 때의 그 향기가 전혀 다른 것을? 주인이 있는 향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 주인만의 독특한 향, 향기 혹은 냄새!
어느 날 아내에게서 우연히 맡게 된 신비감 가득한 향의 그 향수를 새롭게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또 어떤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향의 향수를 아내에게서 맡기 위해 그 브랜드를 선물하지요. 출장을 핑계 삼아. 그런 식으로 내 귀한 아내의 향은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그 추억의 향!
트레져/뿌아종/장 뽈 고티에/조 말론... 제가 좋아했던/좋아하는 향수, 그 향이 소환하는 아름다운 추억들...
오늘은 서둘러 시를 봅니다. 왜요? 이런 날도 있게 하려구요!
'당신에게서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번지고는 했습니다', 야 정말 멋지고 환상적인 상황 아닌가요? 향에 민감한 저로서는 격하게 공감하고 일순 궁금해집니다. 몸에서 나는 향기일까 마음의 향기였을까? 그때 무슨 향수를 쓰셨나 시인의 그 당신은? 그런데 가만 보자, '새각시 새각시 때'라고 콕 집어 말하고 있으니 그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런 뉘앙스지 아무래도?
그렇다면 왜 지금은 아니지? 아내가 변했나? 시인이 변한 것인가? 역시 저는 이 대목에서 소이부답입니다! 하지만 심자한은 아닙니다, 결코. 오히려 갑갑한 마음이지요, 안타깝기도 하구요. 세상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래도 결코 변하지 않은 것 몇 가지는 꼭 있으면 좋겠어요.
그중에 하나는 아내에게서 나는 풀꽃 향기! 아니, 그 향기를 이제껏 너무 오래 맡았다 (거의 30년 가까이 되니까?) 싶으면 조 말론 (Jo Malone)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한 병 사드리세요. 그러면 서로 좋잖아요? 아내는 선물 받아 좋고 남편은 자기가 좋아하는 신비로운 향 맡게 되어서 좋고.
이런, 제가 조금 성급했군요. 아니라네요, 저마저 급거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이 시인의 말은! '그건 아직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요? 그렇지요 여러분? 아침 산책 중에 길가에 혹은 어느 집 담장으로 곱게 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오래오래 한결같이 지속되는 사랑과 의리의 관계를 보는 것은 훨씬 기쁘고 신이 나는 일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시인이 아내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대놓고 시인 자신 고백하듯 하고 있으니, 그 또한 아무런 위험성 없는 흐뭇한 장면이구요. 지금 다른 여성의 얘기를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 참, 아내라는 말이 원래는 '안해' (안쪽 또는 집안이라는 의미. 그러니까 집안 일을 주로 관장하는 사람)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아셨나요? 지금이야 남녀의 가정에서의 역할이 딱히 누구는 안의 일, 또 누구는 밖의 일 이렇게 획일적으로 구분되지는 않는 시대이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안해, 즉 아내는 '내 안에 늘 든든하게 자리잡고 나를 응원하고 지켜주는 사람', 뭐 그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아내, 참 좋은 말이잖아요? 내 안에 있는 사람!
향기, 향내, 그리고 냄새. 묘하게 그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요? 냄새는 그야말로 좀 기계적이고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느낌이 확 풍기지요? 뭐 냄새가 다 나쁜 뜻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왠지 조금은 부정적인 어감을 느껴요. 꽃의 냄새도 있지만 그때는 당연 꽃 향기라고 쓰겠지요?
비릿한 생선의 향기, 이렇게는 쓰지 않지요? 생선 냄새, 돈 냄새, 퀴퀴하고 역한 냄새. 향내는 또 조금 다른 뉘앙스를 남기지요? 풍만하고 이국적이고, 동물성 향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젊잖은 향기보다는 조금은 공격적인 향내가 그립기도 해요. 모두 몽상과 망상, 환상 속의 바람이기는 하지만!
일상 속에서든 꿈속에서든, 아니면 추억 속에서든 아내의 그 아름다운 신비의 향이 늘 가까이 함께 하면 좋겠네요. 뭐 꼭 아내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의 그 풀꽃 향기가 오래오래!
오늘은 여기서 끝낼게요. 이레귤러 바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