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함 그리고 당당함, 절실함과 아쉬움. 장석주 '당신에게'
불어를 전혀 못하는 내가 늘 기억하려고 애쓰는 불어가 하나 있다. 자꾸만 잊어먹는다. 그래도 또 왼다. 그러면 된다. 어차피 내 마음은 그 단어를, 그 말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실 트 플레' (혹은 좀 더 정중하게는 '실 부 플레') - '부탁합니다!'
굳이 그 단어들을 직역한다면 '그것이,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된다면, 그렇다면 부디' 뭐 이런 뜻? 당신이 괜찮다면, 당신에게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면... 이렇게 여러 번 상대방을 살피고 내 말을 받아들일 때의 그의 기분을 미리 짐작해 보고,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나의 청을 꺼낸다. 여리고 사려 깊고, 충분히 아름다운 마음이다.
영어에는 '플리즈'가 있고 독일어에는 '비테'가 있다. 그러나 불어의 이 문장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 앞의 것들이 이를테면 간편식이라면 불어의 이 표현은 정식 풀코스 한 상이다. 이 말을 제대로 듣고서는, 글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하리라. 일본어에 이런 비슷한 표현이 있다. '도우조 요로시쿠 오네가이 시마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그래도 내게는 불어의 그것만은 못하다. 말은 마음이다. 내가 톡을 읽을 때 그저 그 문자만을 읽는 것이 아니고, 그 글에 담긴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읽으려 노력하는 이유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관계의 시작을 위한 중요한 첫 단추다. '감사합니다'가 깔끔한 끝마무리라면, 참으로 정중하게 표현된 '부탁합니다'는 그것을 이끌어 내는 단초인 셈이다. 무릇 모든 일은 시작이 좋아야 그 끝이 좋다. 감사합니다는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고 게임은 그렇게 끝이 났고,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잊지 않고 완벽한 마무리를 한다. 굳이 힘든 것도 아니고. 그것이 감사합니다이다.
그런데 부탁합니다는 그것과는 또 결이 좀 다르다. 아직 게임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이 게임은 과연 내가 바라고 뜻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잘 흘러가 줄지, 괜히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단계다.
그래서 이 말이 더욱 필요하다. 마음을 담아, 나의 간절함을 담아, 상대방의 도움을 진심으로 구하는 그런 자세로! 이 말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 옛날 말 한마디로 천 냥의 빚을 갚은 사람은 분명 이 말로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웃으며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그때는 이런 말을 참 많이 썼다 사람들이. '좀 잘 봐주세요!' 그래, 어디를 봐 드릴까요? 귀? 코? 눈?
"이런 말은 절대 하지 말아라. 상대방을 한방에 무시하는 말이고 그래서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상스러운 표현은 쓰지 말아라!" 일단은 구린 냄새가 풍긴다. 일방적인 비굴함도 엿보인다. 상대방에게 거의 전권을 주는 그런 행동이다. 굴복의 표현이다. 당연 상대방은 크게 부담스럽다. 그 감춰진 리스크의 크기가 도대체 얼마만큼 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불안하다. 결국 일부러 잘 안 본다. 들어줄 수가 없다. 아쉽다, 차라리 당당하게 이렇게 한마디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부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와 그들 사이의 일에 관한 것이든,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든 지금까지의 내 사회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기분 좋은' 부탁의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는 이 말에 대단히 인색하다.
'잘 봐주세요'는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나 자신 알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 가리는 것이 없다. 이 판에 자존심이고 뭐고 그게 무슨 필요가 있나? 이미 다 내려놓은 상태다. 그런데, 처한 상황에 조금 여유가 있다 싶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직은 나도 견딜만하고 내가 다 죽은 것도 아니고, 굳이 내가 뭐 이런 아쉬운 소리까지?'
부탁합니다, 이게 아쉬움에 찬 사람의 소리라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여전히 대등한 관계 속에서 당당하게, 그러나 나의 마음을 담아 상대방에게 건네는 우아한 말이다. 상대방 또한 그것을 안다. 잘 봐주세요와는 기본적으로 그 격이 다르다. 뒷간 갈 때와 갔다 온 후의 절실함의 차이랄까?
이런 긍정적인 솔직함이 가득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부탁을 하는 사람도 그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도 큰 무리는 하지 않는다. 그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정당한 권한의 범위 안에서'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십사 그리 청하는 것일 뿐이다. 크게 검은 부분은 당연히 없다. 있을 수 있는 주고받음의 한 형태다. 두 사람 다 기분이 좋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서로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눈물 나게 이쁘다. 고심 끝에 사랑를 거절해야 하는 그 심정이 마음 아프다. 슬프다. 그냥 내 소감으로 이렇게 한번 표현해 본다.
그 말씀 참으로 고맙고 영광스럽기까지 한데, 그래도 저도 염치라는 것이 있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그 고마운 사랑, 지금도 가슴 설레는 당신의 그 사랑을 제가 넙죽 받을 수는 없어요. 몇 날을 고민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의 그 황홀한 사랑을 거부합니다. 저는 그야말로 개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젊음도 없고 다른 그 무엇도 없어요. 저 들판에 힘차게 살아 숨 쉬는 야생의 나무 같은 당신, 그 신선함에 거꾸로 저는 질식할지도 몰라요. 실상이 그래요.
그러니 그냥 이대로 두세요. 부탁해요! 너무도 오랜 시간 나는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져 있거든요. 궁핍과 결핍이 작금의 나의 일상이에요. 그 속에서 나는 겨우 조금 내게 허여된 이 작은 자유를 느끼는 것을요? 그것마저 빼앗긴다면? 무서워요!
당신은 그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거기 그곳에 그렇게 계세요, 우아하게 멋지게 그리고 고고하게! 저는, 여전히 비겁한 저는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갈래요. 두려워요, 지금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당신과의 이만큼의 거리마저 빼앗기고 사라져 버릴까 봐요. 그건 정말 싫어요, 그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의 나, 정말 내가 견딜 수 있는 최대치예요. 더는 힘들어요, 못해요. 그러니 그냥 이대로 두세요, 부탁해요! 여전히 황홀하고 가슴 설레고,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픈 내 사랑이여!
# 천 냥, 그 옛날 조선시대의 천 냥은 오늘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7천만 원 - 8천만 원쯤 된다고 한다 (쌀값을 기준으로 하면). 금값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무려 2억 원이나 된다고.
한 냥은 100푼과 같으니 '한푼 줍쇼' 할 때의 그 한 푼은 700원 - 800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