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작, 곳간 채우기, 그리고 종두득두. 정성수 '우주의 책'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늘 말씀하셨다. '남아수독 오거서' 사내는 이 땅에 태어났으면 무릇 다섯 수레 분량의 책 정도는 읽어야 하는 법이라고. 그때 문득 다섯 수레에 책을 실으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이 궁금했다. 수백 권은 족히 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집안 장식의 여러 방법 중에 나는 개인적으로 책으로 그리고 그림으로 만들어진 집안의 분위기기 좋다. 내가 읽은 책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다. 그림이 동무하는 서재는 더욱 좋다.
요즘 누가 책을 읽나? 그것도 하드 카피로? 먹고 살기 바쁜 데 책 읽을 시간이나 여유가 어디 있어? 배부른 소리!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뭐 두꺼운 책을, 전공 서적을 읽으시라는 것이 아니라 소화하기 쉽게 정성껏 가공되고 예쁘게 제공되는 그런 짧은 글들은,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본인에게 좋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는 그런 즐거움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길게 더 오래 깊은 만족감과 포만감을 줄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리 권하는 것이지요. 제 글을 읽으시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글, 그것이 시든 에세이든 우리가 읽고 공감하고 기분 좋아질 그런 글들은 많거든요?
밭도 돌려 경작하기를 합니다. 올해 이 밭에 작물을 심었으면 내년에는 아무 것도 심지 않고 그저 퇴비 거름을 주며 그렇게 쉬게 합니다. 지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이제 그다음 해가 되면 다시 귀한 작물을 그 땅에 심지요. 물론 소출은 아주 좋습니다. 땅도 자신이 할 일은 알거든요? 한 해 쉬게 해 준 농부의 그 마음씀도 알구요.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그저 심고 또 심고, 그렇게 빼먹는 일만 계속하면 어느 순간 뒤로 나자빠지는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정신에도, 그래서 영혼에도 양분을 좀 공급해 주세요. 그네들이 말은 못해도, 치사해서 차마 말은 하지 않지만 우리가 미리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라니까요? 요즘은 서점에 가서 돈 주고 책을 살 필요도 없잖아요? 그저 숟가락만 대면 되는 것!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요? 그래도 읽지 않으면 그거야 뭐 어쩌겠어요?
읽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아서일 겁니다. 읽는 행위에 익숙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습관, 기르면 되지요? 조금씩 읽어서 내 일상 속의 중요한 일로 자리잡게 하면 되지요? 저는 젊은 시절 눈을 참 많이 사용해서 지금은 많이 아끼고 있어요. 금새 충혈되고. 그래서 시간을 제한하며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지요. 핸드폰, 뭐 그렇게 볼 것이 많을지 저는 여전히 궁금해요. 매일매일 절대 빼먹지 않고 반복하는 그 습관적인 행위!
아, 자녀분들을 둔 부모님이라면 여러분 자신이 글을 읽는 습관이 가져오는 더 큰 효과가 있어요. 바로 귀한 자녀들이 부모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기억 속에 그대로 사진처럼 남거든요! 종두득두, 콩 심은 데 콩이 납니다. 심지 않으면 결코 나지 않고 또 콩을 원한다면 반드시 콩을 심어야 합니다. 세상의 단순한 이치 아닌가요? 그런데 안 심어요! 심지도 않고 무언가가 나기를 기다려요. 싹이 날 턱이 있나요?
저 어릴 때는 꽤나 산다는 집은 유행처럼 집안 거실 한쪽에 브리태니카 전집을 꽂아두었지요. 저는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뭐 굳이 읽을 것이 있었나, 저는 지금도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아동문학 전집은 몇 번씩 읽었어요. 소공자, 소공녀, 허클베리 핀의 모험... 좋았지요, 재미있었지요 그들의 세계가, 그 세계가!
요즘은 여건상 누군가를 제 거처에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식사 대접을 위한 경우는 더욱 드물구요. 그런데 한 두 번 귀한 동무를 식사에 초대하는 경우, 저는 손으로 직접 메뉴판을 만들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도착하면 바로 보게 해요. 몇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 제 마음이요. 잘하는 솜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귀한 동무 당신들을 위해 제가 이런 음식들을 만들어보았답니다. 맛있게 드세요! 둘째, 오늘 도대체 무엇을 어떤 순서로 먹게 될 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알고 먹으면 더 좋잖아요? 셋째, 상대방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예의지요. 나의 소중한 손님, 제가 손으로 직접 꾸민 이 메뉴판, 아 참 이따가 갈 때 가지고 가세요, 원하시면!
혹시 궁금하세요 저의 그 메뉴판? 제 기억이 맞다면 대충 이렇습니다. 전채 1 - 브리 치즈와 필러로 얇게 저며낸 당근 후라이팬 달걀 케익/전채 2 - 삶아 찢어낸 가지 들기름 볶음과 스크램블/전채 3 - 세 가지 전 (감자 둥글게 얇게 썰어 부친 전, 참치 계란 전, 고추장떡)/스프 - 덩어리 씹히는 핑크 토마토 올리브 오일 스프/메인 1 - 알리오 에 올리오/메인 2 - 닭가슴살 노릇노릇 구이, 삶아낸 작은 당근과 감자 그리고 적당하게 저민 사과 후라이팬 구이, ... 뭐 이런 식이었지요. 어때요 꽤나 먹음직스럽지요?
알아야, 결국에는 알아야만 우리가 답답하게 벽을, 담장을 마주하고 앉아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일을 막을 수가 있지요. 저는 어릴 때 아버지가 처음 제게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면장 그러니까 지방의 작은 관공서 면의 장 (헤드)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담벼락을 코앞에 맞대는 그런 불행한 상황을 면할 수 있다 (담을 맞대는 그런 일을 면한다) 그런 뜻이지요. 수시로 좋은 거름 주기, 좋은 콩 씨앗 심기, 내 마음의 양식 곳간에 가득하게 하기.
이 지구에서 날마다 우주의 책을 펼치는 시인, 우주의 책이니 그리 열심히 읽어도 여전히 남고 넘기고 넘겨도 다시 처음. 당연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읽기를 계속한다. 부럽다, 멋지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보이지 않는 신의 그림자를 본 듯하다 말한다. 와우! 그럼에도 여전히 겸손한 시인은 앞에 놓인 책 한 권 다 읽지 못했다고, 책을 읽고 있는 자신 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고 그리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그러면서도 독서는 끝이 없는 것이라고 아니 끝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말한다. 밤에도 별빛 아래서, 그리고 이른 새벽에도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춰올 그때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다, 자신을 읽는다, 그리고 우주를 읽는다. 멋진 시다, 참으로 멋진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