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와 그의 최근 흑백영화들
사건 이후 홍상수의 영화들
지난 목요일에 갑자기 홍상수 영화가 보고 싶어서, 왓챠 플레이로 <클레어의 카메라>를 보았다. 너무 좋아서 금요일엔 아침부터 <풀잎들>을 보았다. 어두우면서 재밌었다.
풀잎들을 보고 떠오른 영화는 단연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다. 그래서 토요일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강변 호텔>을 보았다.
<클레어의 카메라>를 제외하면 모두 흑백영화이다. 이제 홍상수 영화 중 내가 안 본 영화는 최근작 <도망친 여자> 포함 두, 세편 정도인 것 같다. 다작하는 그의 영화를 거의 모두 보았다.
'그 사건' 이후로 홍상수의 영화는 어두워졌다.
사건 이전의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홍상수의 실험을 보조하거나 참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별로 무거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재미있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영화들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는 왜 홍상수 영화를 좋아할까?
그 이유를 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냥, 좋다.
좋다는 게, 이 영화의 메시지에 내가 동의한다거나 등장인물 중에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다는 건 아니다. 사실 메시지가 뭔지도 모른다.
그냥 화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그 모습. 나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걸 전혀 안 좋아하고 그런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지만 화면을 통해서 그 장면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 계속 반복되는 대사들. 같은 듯 다르게 변주되는 장면들.
너무 뜬구름 잡는 말들을 하고 있어서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나오는 대로 뱉는 말인지 헷갈리는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설마, 혹시나, 만에 하나, 이런 대사가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라면, 진짜 진지하게 생의 화두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너무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정말 한 번뿐인 인생 피하지 않고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결의 같아서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게 된다. 영화가 끝나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흔들리지 말고 내 길을 가자고 계속해서 자신을 다독이는 허물어져가는 약한 인간의 모습이 딱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내가 그 인간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자문하고는 입을 다물게 된다. 아무튼 홍상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와중에 영화 속 죽음의 빛깔은 더욱 선명해진다.
극 중에서 내내 김민희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언니'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은, 그 사건으로 힘들어진 연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제 남자는 자신 하나로 끝내고 앞으로는 송선미, 서영화가 연기하는 그런 여성들과 연대하며 살라는 유언 같기도 하다. 최근의 영화들에서는 스크린 밖 관객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잔소리하는 것 같다.
'너희들도 곧 죽어. 그러니까 진짜 인생을 살아.'
그에게 죄가 있다면 벌할 자격이 있는 존재가 벌할 것이다. 그게 내가 아니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홍상수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만 괴로웠으면 좋겠다.
죽을 만큼 괴로워서 영화도 만들지 못하고 죽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홍상수라는 개인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