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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002] 심심함을 즐기는 사람

엄마도 아직 노력 중

by 오공부

오이지에게.

안녕, 칠 전 퇴근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두 번째 편지를 쓴다. 너희들은 심심한 게 좋니?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테지. 마도 심심한 것보단 정신이 쏙 빠지도록 몰입되고 재미있는 게 좀 더 좋은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일은 하루에 한 번은 커녕 일주일, 한 달에 한 번 일어나기도 어려워. 적어도 마흔을 앞둔 직장인한테는 그래. 어떤 날은 하루종일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낼 때도 있다니까.

심심한 건 따분하지. 무언가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은지 모르거나, 알아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속상한 기분이 들기도 해. 래서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을 찾게 된단다. 예를 들면, TV나 유튜브 같은 영상을 보는 거야. 특별히 보고 싶지 않은데도 나의 의식을 어딘가에 맡기기 위해 채널을 돌리고 유튜브 속 수많은 영상들을 스크롤해. 아니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달고 맵고 짠 음식을 찾는 거지.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만큼은 심심하지 않거든. 어떨 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때도 있어. 엄마는 특히 집을 떠나 기숙사에 살면서 회사를 다니던 20대 후반에 이런 생활을 했던 것 같아. 그게 스트레스를 푸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믿었던 거지. 그래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렸느냐고? 잘 모르겠어. 그 순간에는 즐거웠던 것 같은데 배는 터질 듯이 부르고 TV도 재미없어지고 나면 후회를 했던 거 같기도 해. '내가 왜 소중한 저녁 시간을 이렇게 보냈지?' 하고 말이야.


심심함, 공허함,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즉각적인 방법만 찾다 보면 근본적인 해결이 더 어려울 수 있어. 단 음식을 먹으면 순간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지만 그 순간을 넘기면 더 깊은 우울이나 부정적인 기분이 찾아온다는 연구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더 단 음식을 찾게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자극을 찾기 전까지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수도 있어.


아, 너무 잔소리가 되어버렸네. 잔소리를 편지로까지 남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여기까지 읽던 너희들이 '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라고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 그러니까 엄마 말은, 그냥 심심함을 즐기라는 거야. 즐기는 게 안 되면 그냥 견뎌보라는 거야. 1분, 5분, 10분 이렇게 시간을 점차 늘려가 보는거지. 심심함과 함께 있어 봐. 어떤 녀석인지 한 번 살펴봐. 그리고 심심함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보는 거야.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심심함인지, 새로운 경험이 필요한 심심함인지, 진짜 중요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심심함인지.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보면 보일 거야.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이 어느 순간 재밌어지기도 할 거야. 결국엔 심심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반가움이 생길지도 모르지. '나에 대해서 알아갈 기회가 또 찾아왔군.' 하면서.


아직은 그런 고민이 없겠지만(너희는 아직 8살, 6살이니까) 나이가 들 수록 '내가 나에 대해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단다. 이것만큼 당황스러운 게 없는 게, 1년 365일 24시간 내가 나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데, 내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고, 나의 모든 역사를 살아낸 장본인인데 내가 나를 모르다니?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돼. 내가 나를 알아가려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 일시적인 자극에 나를 내맡겨버리는 순간, 내가 나와 함께 있긴 하지만 나와 떨어져 있는 것과 같아져.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서 한 행동이 아니고 귀를 기울이기 싫어서 도망친 행동이라서 그래.


심심하다는 건 나를 알아가는 순간임을 기억해 줄래? 5분 정도 타이머를 맞춰두고 멍하니 있어보거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여건이 된다면 밖으로 나와 조금 걷는 것도 좋겠지. 유튜브와 자극적인 음식은 그 5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해도 절대 늦지 않다고 생각해.

엄마도 그렇게 하느냐고? 늘 그렇진 않다는 걸, 그래서 노력 중이라는 걸 고백할게. 그럼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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