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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해 줘

상대와 얼굴을 붉히는 것이 두려워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진실.

by 오공부

오랜만에 놀러 간 대학 선배 부부의 집.

아이들은 물놀이도 하고 마당 있는 집에서 층간소음 걱정 없이 신나게 놀았다.


더 놀면 안 되느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다음에 또 놀러 오자며 달래고는 나설 채비를 하는데, 남자 선배가 "아저씨 뽀뽀해 주고 가야지" 한다. 순간 헉 했다. 우리 아빠(외할아버지)한테도, 남편(아빠)한테도 안 해주는 뽀뽀를 해달라니. 하지만 반나절을 함께 지내보니 자신의 딸들에게도 자주 뽀뽀 해달라고 하고 그저 아이가 귀여워서, 이제 조금 친해지지 않았나 싶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해주지 않는 아이에게 여러 번 뽀뽀를 요청하니 불편했다.


결국 해주지 않고 헤어졌지만 다음 날이 된 지금도 마음이 계속 불편하여 '왜 그럴까?'라고 생각해 보니 결국 나는 나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오늘 처음 본 어른이 아빠한테도, 외할아버지한테도 안 하는 뽀뽀를 요청하고 있는데 엄마(나)가 단호히 막아주지 못했다는 사실. 나의 무력함에 화가 났던 거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얼굴을 붉히는 것이 두려워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진실이(결국 안 해주었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 엄마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거다.


자책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얼굴 붉히지 않고 웃으며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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