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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성취들

내 기분은 나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나는...

by 오공부

일요일 오후에 나를 가장 자주 찾아오는 감정은 '무기력'이다. 내일이 월요일이란 사실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곧 출근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이렇게 '더러워진다'는 것은 뭔가 설명이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특히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하늘이 파랗게 예쁜 날엔 화창한 날씨와 극명히 대비를 이루듯 내 기분은 한층 더 어두워진다. 이런 날씨가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느껴진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때에 하면 (그나마) 좋은 나만의 활동이 있다. 바로 '주말의 성취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내가 이번 주말 동안 어떤 것들을 했는지 번호를 매겨가며 곱씹어 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1) 요리를 2회, 설거지를 3회 했다.

2)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3) 건조기 필터에 쌓인 먼지를 제거했다.

4) 안 입는 옷을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

5) 이불을 갰다.

6)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1회 했다.

등등...



이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록한다. 기분이 더럽고, 내 삶이 하찮게 여겨지는 중에도 나는 이렇게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해냈다, 얼마나 괜찮은 주말인가. 나는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가!



정신승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스스로를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믿는다. 삶의 의욕이 꺾일 때,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이 나를 덮칠 때, 나를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내가 나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어야 한다. 그 동아줄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생겼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내가 그 줄을 잡고 어둠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는 기능만 충실하다면 된 거 아닐까.



내 기분은 나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와 가족을 먹이고 생활하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하고 이렇게 생각을 글로 풀어내기도 했다. 나라는 인간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 조금은 좋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점진적인 생각의 전환이 일요일 오후의 어둠을 조금은 물리치고 그 자리를 다음 주를 살아갈 용기로 채우게 한다.


또 다른 성취 : 아이들과 수다떨며 귤 한 팩을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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