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뭐랄까, 태어났을 때부터 쭉 엄마로 살아왔던 사람처럼보였어.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의 엄마를 상상해 보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자식에 대한 애착은 무엇보다 강했지. 자식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고야 말겠다는 사명말이야.
소꿉놀이를 하던 시절엔늘 '주인공'역할을 하라고 말했고, 학교에들어가선 늘 남들보다먼저 '손'들어 발표하라고 했어.물론 공부를 잘해야 하는 건 갖추어야할 첫 번째 덕목이었지.
수줍음 많고 어리숙하고 공부머리도 없는 나로서는그 모든 게 어려운미션이었어.
돈, 시간, 관심.
많은 걸 쏟아붓는 엄마의 희생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잘해 보려고 해도 늘 잘못만 하는 것 같은 내가 싫었어.그 시절 열두 살 남짓의어린아이에게 삶은 넘고 넘어야 하는 서바이벌이었고 그럴 때마다 맛보는패배감에여린 무릎은 휘청거렸지.
내겐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어.
언닌 나와 다른 사람이었지. 엄마의 삶에 대한 전투사 기질을 물려받았다고나 할까.
'나가자 싸우자이기자!' 하면 늘 이기고 오는 사람.
내게 어려운 많은 것들이 언니에겐 쉬웠어. 엄마에게 언니가 있어 참 다행이었지.
그 시기를 떠올리다 보면 유난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학교의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던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
갈색 웨이브의 곡선을 따라 한 올 한 올 윤이 나는 단발머리. 엄마의 하얀 목덜미를 빛내 주는 영롱한 진주목걸이에 늘씬한 라인을 따라 흐르는 타이트한 실크 스커트와 가느다란 스틸레토힐까지.
엄마는 가히 독보적이었어.특히 턱끝을 살짝 들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는 누구든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지.엄마가 들어서자 선생님을 포함한 교실의 모든 눈이 한 곳에 모아지는 걸 난 똑똑히 볼 수 있었어.그리고 언제나처럼 엄마 주변으로 둥그런 무리가 형성되곤 했지.
'니들, 다 봤지? 우리 엄마야.'
교실의 묵은 먼지 한 톨 만도 못한 존재감의나는 그때만큼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날이었어. 교실로 들어온 엄마를 확인하고 수업이 끝나면 엄마에게 달려가리라 다짐했지. 선생님의 마무리 인사멘트가 나오며 <어머니 은혜>를 합창할 무렵,다시 한번 뒤를슬쩍 돌아봤어. 근데 엄마가보이지 않는 거야.
가슴이 쿵 내려앉으려는 찰나, 언니반 수업이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지.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위층언니의교실로 뛰어 올라갔어.
복도는 사람들로시끌벅적했지만 그 사이에서도 해처럼 밝은엄마얼굴은 한눈에 들어왔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발견한 날 아침처럼 가슴이 막 뛰었어.엄마는 뭐가 재밌는지 엄마를 에워싼 사람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어.
역시 언니야...!
반장이었던 언니가 보나 마나수업 분위기를 주도했을 거거든.교실의 지박령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던 나완다른 존재였으니까.어찌 됐든다행이었어.
엄마 무리의 사람들은 이제 어디론가로 걸어가려는 참으로 보였어.그 모습을 놓칠까 봐목청껏 불렀어.
"엄마!"
엄만 돌아보지 않았어.
다시 한번 더 크게 불렀어
"엄마!!!"
못 들은 건지여전히 돌아보지 않았어.쉬는 시간이 곧끝나갈 텐데...마음이 초조했지.
때마침무리에 있던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어. 날 보곤 무어라 말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엄만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총총총그대로 시야에서사라졌어.
어느새 수업시작종이울리고 복도는 순식간에 고요해져 있었지.공연이 끝난 후 불 꺼진 객석에서 나가야 할 타이밍을 놓친 관객처럼 혼자우두커니 있었어. 나는 수업에 늦었단 이유로 교실 뒤편에 손을 들고서 있어야 했어.
엄만 그날, 느지막이 집으로돌아왔어.
"엄마가 늦었네, 많이 기다렸지?"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사 들고 와 식탁 위에 분주히풀어놓으며 말했어.
"어서 앉아. 언닌 아직 안 왔지?"
엄만 아직도 신나 보였어.
상기된 표정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는평소엔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었어. 뱃속 가득 포만감에 공격본능이 소거된 육식동물의 표정이랄까. 덩달아 신이 나그만,해선 안 될 질문을 던지고 말았지.
"근데, 엄마 아까 학교에서 나 못 봤어?"
"응? 봤지. 너희반 교실에갔었잖아."
엄만 당연한 걸 묻냐는 듯내쪽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어.
"아니 아니. 그때 말고. 언니네 반 복도에서 나 엄마 불렀었는데... 못 들었어?"
"엄마 보려고 언니네 반 앞까지 갔었단 말이야. 어휴몇 번을불렀는데...복도가 너무 시끄러워가지고."
내 말을못 알아들은 건지 엄마는 감자튀김 포장지를 벗겨 접시에 옮겨 담고 케첩을 찾느라 분주했지. 엄마는 대답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나를 힐끗 봤어.
"평소에도 수업시간에 말이 그렇게 없니?"
엄마의 시선이 일순 서늘해졌어.
"............"
"수업 내용을 알아듣기는 하는 거야?"
".........."
.... 대화가 왜 갑자기엉뚱한 데로 튀는 건데.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어.
"엄마아!나 배고파!"
오 구세주, 언니였어.
나이스타이밍!!
"아이고 우리 큰 딸! 배고프지? 손 씻고 어서와 앉아!"
언닌 엄마에게 가방과 옷을벗어주며 말했어.
"햄버거 사 왔지? 빅맥으로 치즈 두장? 셑트맞지?"
언니의 등장으로 식탁엔 다시 활기가 넘쳤어.
언닌 씻지도 않은 손으로 감자튀김 한주먹을입에 털어 넣다가 맞은편의 나와 눈이 마주쳤어.
"야, 넌 벙어리냐? 엄마가 속이 터져 못 보고 있겠다더라. 우리 교실 앞 복도에선 그렇게 목청이 터져라 엄마를 불러대더니. 쪽팔리게 수업시간엔 말도 못 해?"
...... 뭐?
"...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들어서 알지. 복도가 아주 쩌렁쩌렁한 데니 목소린 거모르겠냐?다 큰 게 엄마 뒤나 졸졸 쫓아다니고.쯧"
뭐? 내가 부르는 소리를...들었다고?
언니 옆에 있던 엄마를슬쩍 쳐다봤어.
엄만... 무표정한 얼굴로 언니의 빅맥을 사등분으로먹기 좋게 쪼개고 있더라고.
그때 난 첨으로 생각했던 것 같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그 이후로 나의 의구심은 조금씩 커져 갔지.
그렇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엄마에게 물어보진 못했어.
내가 그때의 엄마나이가 됐을 때, 내 아이가 그때의 나 정도로 자랐을 때, 그제야묻어 두었던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 보였어.괜찮은 우리 관계를 망치는 걸까 내가 나쁜 딸이 되는 건 아닐까,죄책감과 걱정으로 고민하고 망설였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어.
엄만...기억하지못하더라고.
'얜 유난스레 별 걸 다 기억한다'면서.
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고 말한 그날처럼 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믿는 게좋은걸까?
만약엄마가미안하다고했다면. 그랬다면 난 엄말 용서할 수는 있었을까.
모르겠어.
그런데한 가지 분명한 건,
엄마가 되고 보니알겠는 거야.
내게 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 엄마의 헌신.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 아래 내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던 무엇.모성도 희생도 비슷한 뭣도 아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