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정집에 들렀을 때였다.
시집가며 정리했던 물건들이 아직도 집 안 구석구석에서 나온다며 부모님이 몇 가지를 내밀었다. 그중에는 열 살 무렵과 고등학교 시절에 썼던 낡은 일기장도 있었다. 몇십 년 만에 펼쳐본 종이 위에는 어린 나의 눈으로 본 세상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일기 속에서 나는 1996년 어느 봄날, 외할머니 산소에 함께 갔던 날을 다시 만났다.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던 열 살의 나는, 아빠가 산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진달래와 개나리를 찾는 까닭이 궁금했다.
"작고 예쁜 꽃을 심어드리고 싶어서."
아빠는 결국 작은 꽃 몇 송이를 캐어다 정성스레 흙을 고르고 다듬어 산소 앞에 심었다. 흙 묻은 손길까지도 어린 나의 눈엔 선명했고, 그 장면이 그대로 일기장에 남아 있었다. 그 기록 덕분에 나는 젊은 날의 아빠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다른 장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책은 안 읽어도 된다. 언니한테 내용을 물어보면 되니까.'
꾀많은 꼬마는 과제를 피해 가는 법을 일기장에 버젓이 적어두었다. 그림은 잘 못 그리지만 화가가 되고 싶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 같은 꿈을 적어 내려갔다. 읽다 보니 웃음이 터졌다. 낯간지럽고도 귀여운 어린 나의 모습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까맣게 잊었던 사소한 마음들, 어린 날의 상처와 바람들이 그 속에서 되살아났다. 기록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때의 공기와 감정, 다정한 손길을 오늘로 불러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오래된 일기장은 나를 다시 나에게 데려왔다.
기억의 조각을 모아 마음을 다독이고, 아빠의 다정함을 새삼 깨닫게 했으며, 천진함에 웃음 짓게 만들었다.
오래된 일기장은 결국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선물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