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내가 다시 피겨화를 신게 되다니... 직업군인이었던 남편이 전역하고, 넷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그리웠던 빙상장으로 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한 김연아 선수 덕에 피겨 인구가 많아졌고, 고등학교 때까지 빙상과 롤러피겨를 오가며 선수 생활을 하고, 결혼 전에 아이스링크와 스키장에서 지도자를 했었기에 내게 경력단절은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오 그런데 몸이 좀 이상하다. 쌩쌩했던 내가 스핀을 할 때 어지럽고, 점프를 하면 어색하며, 아이 낳고 더 심해진 건망증으로 가끔 날집을 낀 채 빙상장 안으로 들어가다 어이없이 넘어지기도 하고,
거기다 새로 입사한 빙상장에 그 당시 나이 어렸던 피겨 코치들은 모두 김연아 선수와 시대를 풍미했던 아주 어리고 아직도 쌩쌩한, 현역에서 갓 코치로 나온 예쁜 스케이터들이었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지라 왕선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겁이 나고, 내심 삼십 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원망스러웠다.
보이는 직업이니 더더욱 자신감은 없었다.
10년을 쉬니 그들과 겹치는 시간과 연결고리도 거의 없어 이방인이나 마찬가지 었다.
경력단절 없이 쭉 살아남은 코치들은 선수들만 가르치는 이른바 '큰 선생님'이 되어있었고 나처럼 경기실적도, 경력도, 나이도 애매한 코치는 (내 생각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반전이 하나 있었으니,
아줌마 코치인 나는 '일하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이었다.
매일매일 같은 일 (스케이팅만 해왔던 게 )만 한 게 아닌
두 딸을 키우다가오랜만에 사회에 나와서, 내가잘하는 것을 하니 아이스링크는 내게 회사이지만, 또한 해방된 장소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딸들을 키워보니 비슷한 또래들의 성장 속도나 운동능력을 잘 알 수 있어 눈높이 지도가 가능했다.
아직 어린 두 딸들을 위해 도와주시는 이모님께육만 원을 드리고단체 강습보수이만 오천 원을 받아도 행복했다.
그렇게 난 다시 워킹맘이 되었다.
그때의 난 어린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강박 마인드와 함께 했지만 내 코가 석자였고, 그저어렵지 않고 대하기 편한선배가 되기 위해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선배란 밥을 잘 사 주는 게 아닌 모범이 되는 멘토라는 걸 깨달았고, 그룹에 섞이는 것뿐만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다시 성장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지고 나는 집중하는 법을 다시 깨달았다.
내 위치를 굳이 따지지 않고
즐겁게 가르치고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며 일을 즐겼다.
살아보니 뭐든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심으로 즐기다 보면 저절로 잘될 때도 있는 걸 알고, 열심히 해도 때론 운이 안 따라줄 때도 있으며, 모두 세상의 주인공을 꿈꾸지만 모두가 1등일 수 없고, 그래도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은 '나 '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기에 피겨 기술과 함께 지도자로서 함께 가는 길을 인도해주고 싶었던 내 마음이 통하지 않았나 싶다.
어느새 선수들이 많이 모이고 내게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었다.
역시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즘은 성인 스케이터들이 많이 늘었다.
일과 또는 육아를 함께하며 꿈이었던 피겨스케이팅을 한다는 그들을 보며 대견함과 함께 경력단절이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려본다. 조금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또한 다시 십 년이 지난 '나'를 다시 오롯이 보며 늘 똑같은 나는 없기에 조금 더 안도하고 안주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다시 스케이트 끈을 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