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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Sep 18. 2015

폭주

때때로 폭주하는 번역사!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가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무섭게 공격을 퍼붓는 상태가 ‘폭주’다. 폭주 상태의 몬스터는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쉬지 않고 온갖 스킬을 사용하며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몬스터 폭주는 주로 ‘최후의 공격’에서 출현한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하는 유저 입장에서는 폭주한 몬스터를 반드시 처치해야 한다. 하지만 던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몬스터 입장에서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주자인 그가 뚫리면 해당 스테이지는 끝나고 더 이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물론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그 스테이지에서 드랍되는 자원이 필요하다면,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스테이지를 다시 시작하는 유저는 별로 없다. ‘자동 소탕’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클리어 한 스테이지는 처음부터 ‘사냥(플레이)’하지 않고 ‘자동 소탕’ 기능으로 단 몇 초 만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게임 번역을 마치자마자 다른 게임의 빌드 테스트를 이어서 했다. 식중독에 걸려 골골대다가 깨어나 일을 하고 다시 또 일을 하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균형을 잃었다. 빠듯한 일정에 따라 시간은 흘러갔고 균형을 되돌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나흘 동안, ‘최후의 공격’ 상태로 돌입한 나는 그대로 ‘폭주’했다. 불과 얼마 전에 ‘더 이상의 밤샘은 하지 않겠다’ 던 다짐은 진작 깨졌다. 이제 그런 무의미한 다짐 따위는 하지 말아야겠다. 


‘폭주’ 상태가 된 나는 일시적으로 ‘무적’이 되었다. 잠도 안 자고 잘 먹지도 않은 상태에서 의자에 앉은 채 굳어버린 화석처럼 일일일 일에 매진했다. 하루에 한 번 자던 잠을 이틀에 한 번으로 줄이고 식사 시간도 휴식시간에 간단히 처리했다. 식중독을 겪으며 예민해진 장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아무거나 먹고 탈이 나느니 아예 안 먹는 게 나았다. 입맛이 없기도 하고, 간헐적 단식을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집중도가 높아졌다. 일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불가능할 것 같던 업무량을 처리했다. 그것도 예상시간보다 빨리! 시간을 확인하며 난 흡사 신비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얼얼해졌다.


‘폭주’가 끝난 몬스터처럼 나 또한 ‘폭주’를 끝내고 장렬히 전사했다.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듯 ‘잠의 세계’로 입장했다. 그리고 암전.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꿈의 세계에서 난 그대로 암전 되어 ‘폭주’로 인한 ‘대미지’를 서서히 해소했다. 다시 ‘부활’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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