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판매
대표님이 직접 제조하신 제품 자랑이 쏟아지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표님의 설명은 정말 상세했다. 제품의 부품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설계 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 심지어 실패작들까지 모두 보여주셨다.
"이 나사 하나도 보통 나사가 아니에요.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거고, 이 고무 패킹도 특수 재질이라 10년은 거뜬히 버팁니다." 대표님의 눈이 반짝였다.
한쪽 구석에는 시제품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성공한 제품도 있었지만 실패한 제품들도 많았다. 대표님은 실패한 제품들조차 애정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자식들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건 처음에 만든 1호 제품이에요. 지금 보면 투박하죠? 하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아이디어가 지금 제품의 기초가 됐어요." 대표님이 먼지를 털어내며 오래된 시제품을 보여주셨다.
늦은 시간 방문이었기에 빨리 협상을 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대표님 제가 온라인에서 대표님 제품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중국산 제품을 지금 잘 판매하고 있지만 품질 이슈들이 있어서 대표님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잘 팔릴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제가 자금 문제도 있고 창고 문제도 있어서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일시적으로 위탁이 가능할까요?"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내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제품 구경하고 이야기 나누는 정도였지만, 이제부터는 진짜 비즈니스 이야기였다. 대표님의 반응이 궁금했다.
위탁이란 들어온 주문을 정리해서 주문자, 배송지 정보를 위탁사(제조사)에 전달하고, 실제 재고 보관과 제품 발송은 위탁사(제조사)에서 해주는 시스템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재고를 보유하지 않아도 되기에 나에게는 최적의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제조사 입장에서는 추가 업무가 생기는 것이어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네 그러시죠. 하지만 마진을 많이 드리지는 못합니다."
대표님의 답변은 예상보다 흔쾌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쉽게 승낙해 주실 줄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표님은 자신의 제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고 계셨다. 그동안 B2B 위주의 사업을 하시다가 B2C 시장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네 괜찮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판매가 39,000원에 하나를 팔면 나에게 약 만원이 남는 정도였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중국산 제품을 팔 때보다는 마진은 적었지만, 객단가는 높았다. 품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전용 가방은 혹시 고려해 보실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대표님이 서랍에서 네모난 작은 투명 파우치를 꺼내셨다.
"이렇게 생긴 파우치는 어떨까요?"
경보기는 원형으로 생겼는데 파우치는 사각이었다. 그것도 투명한 목욕가방 느낌...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마치 수영장에 갈 때 쓰는 방수 파우치 같았다.
"이건 좀 안 될 것 같아요. 전용으로 하나 만들면 좋을 것 같네요. 한번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저희도 제조사를 좀 찾아볼게요."
사실 나는 이미 머릿속에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제품의 원형 모양에 맞는 원형 파우치, 그리고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느낌의 가방.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첫 만남에서 다 이야기하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나의 첫 기업 탐방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예상했던 1시간 미팅이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표님의 제품에 대한 열정과 나의 사업에 대한 열정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대표님 아내분이 준비해 주신 차와 간단한 과자를 먹으며 마무리 인사를 나누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앞으로의 협력을 약속했다. 대표님의 명함은 두툼한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는데, 요즘 보기 드문 정성이 느껴졌다.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네, 언제든 연락하세요. 우리 제품이 잘 팔렸으면 좋겠어요."
사무실을 나서며 뒤돌아보니 대표님과 아내분이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어주고 계셨다.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따뜻한 관계로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저녁 9시에 다시 집으로 출발하여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밤이 깊어서 도로는 한결 한산했다. 차 안에서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며 운전했다. 오늘 하루 동안 경험한 것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뿌듯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회사 일에서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이었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나만의 일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만난 대표님의 모습, 작은 사무실의 따뜻한 분위기,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진짜 사업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취미로 하는 부업이 아니라, 진지한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표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비즈니스 미팅을 넘어서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