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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무너뜨리는 감정 쓰레기

by 오분레터

감정창고


50대는 인생의 많은 풍파를 지나온 시기다. 100세 인생의 절반 하고도 그 이상을 살아온 나이다.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무던히도 많이 참고 살아왔다. 내 안의 어떤 감정이 올라와도 “그래 참아야지, 참아야지”라며 마음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오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안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참는 게 미덕이라 배웠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50대가 되어 돌이켜보면, 그 미덕이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라진 척했을 뿐,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모습을 바꾸어 쌓여 있다. 어떤 날은 말끝마다 짜증이 묻어나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내 안의 감정창고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곳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참는 연습’ 대신 ‘들여다보는 연습’,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50대 이후의 인생을 가볍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억누른 감정은 병이 된다


대부분 몸이 아플 때 그 원인을 신체에서 찾지 감정에서 찾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 슬픔, 억울함 같은 감정은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분노는 위장을, 슬픔은 폐를, 억울함은 우리의 간을 상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한의학뿐 아니라 현대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도 감정이 질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 가족 앞에서 항상 밝은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년의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자녀를 위해, 부모를 위해 늘 참고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나만 견뎌내면 돼” 그 감정을 말하지도 풀지도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살아낸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 없이 속이 쓰리고, 밤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계속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이제 그만 참아”


감정을 억누르면 안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억눌린 감정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이 몸일 수도 있고, 관계의 갈등일 수도 있다. 혹은 나 자신을 향한 무기력과 자책으로도 이어진다. 감정은 억제의 대상이 아니다.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과 다르다. 50대에게 필요한 건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기록이다. 오늘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보자. 누군가에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종이 위에 감정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오늘 그 사람의 말에 서운했다. 왜 서운했을까? 아마도 내 의견을 가볍게 흘려듣는 기분이다. 내가 무시당하는 느낌에 서운함을 느꼈나 보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연습만으로도 내 감정을 다루는 연습이 된다. 처음엔 어색할 수 있지만, 반복하다 보면 내 안의 숨어있는 감정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실체는 대부분 내가 스스로 만든 오해나 상처일 때가 많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감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연습은,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감정과 관계는 함께 간다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꼬이게 된다. 특히 50대는 자녀와의 갈등, 배우자와의 거리감, 직장에서의 소외 등을 겪는 시기다. 이 모든 관계 문제의 밑바닥에는 억눌린 감정이 자리한다.

어느 날 자녀가 내 질문에 아무 대답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해보자. 순간 “내가 무시당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때 그 감정을 바로 인정해야 한다. ‘내가 지금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구나.’


이렇게 내 감정을 먼저 인식하고 나면, 자녀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차분히 대화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웃음이 많았는데 요즘은 말수가 줄어들었다면 그 이유를 감정에서 찾아보자. 서운함이 쌓였는지, 기대가 사라졌는지, 감정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회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은 결국 관계를 회복하는 연습이다. 그리고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는 다시 삶에서 따듯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용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했다. 특히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자라온 세대는 감정 표현을 부끄러워하거나, 그 자체를 무능함으로 연결 짓기도 한다. “남자는 우는 거 아니다”, “어른은 참을 줄 알아야지”라는 말속에서 감정을 숨기라는 무언의 강요가 들어있다.


하지만 진짜 강한 사람은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관계도 흔들리고, 인생의 중심도 잃게 된다. 반면,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더욱 단단히 세워나간다.


내 안의 감정을 인정한다고 해서 감정에 끌려 다니라는 뜻은 아니다.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내 안의 감정이라는 신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서 왔는지, 왜 생겼는지 질문하는 습관이 더욱 지혜롭고 건강한 50대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의 감정은 삶의 나침반이다


감정을 들여다본다는 건, 단지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감정은 내 안에서 진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언어다.


50대 이후의 삶은 감정을 무시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 안의 감정과 대화하며 살아갈 때다. 그 변화가 50대 인생의 후반전을 훨씬 더 의미 있고 충만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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