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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 이제는 그만해도 괜찮다

by 오분레터

감정을 참는 건 어른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감정을 숨기고, 꾹 누르고, 아무 일 없는 듯한 얼굴을 유지하는 일이 언젠가부터 내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 때문이다. “참아야 어른이지.” “화를 내면 네가 지는 거야.”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겉으론 웃어야 하는 거야.” 그런 말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며 자라났다. 그 결과,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리광이고, 미숙함이고, 부끄러움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에게 속상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려웠다. 이유 없는 눈물이 나와도 꾹 참았다. 분노가 치밀어도, 마음이 부서지는 아픔이 와도, 늘 괜찮은 척을 했다. 내 마음의 기울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화가 잘 되지 않았고, 잠을 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한없이 지쳤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기력했고, 멀쩡한 날에도 눈물이 났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나를 너무 오래 참아왔구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억눌러진 감정은 시간 속에 잠시 숨을 죽일 뿐, 언젠가는 다른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몸의 이상, 마음의 고장, 관계의 균열로 다가온다. 참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단지 나를 갉아먹는 방향으로 바뀔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래 감정 표현을 잘 못해.” “그냥 조용히 넘기는 게 편하더라고.” 그 마음도 안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꼭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감정을 쏟아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표현의 시작은 아주 작은 고백이다. 나에게 솔직해지는 일, 그것이 첫걸음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그 말이 나를 많이 아프게 했구나.’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너무 외로웠구나.’


이렇게 나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씩 풀린다. 감정은 억제의 대상이 아니다.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다. 억누르면 병이 되고, 인정하면 삶이 된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마음을 관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피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이 흐를 수 있도록 내 안에 여백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나에게 말 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곧 몸을 통해 신호를 보낸다. ‘제발 나 좀 들여다봐 줘.’ 하고.


지금 우리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매일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묻는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감정을 느꼈지? 언제 서운했고, 언제 기뻤고, 언제 외로웠지? 그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어 쓰다듬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에, 혹은 마음속 조용한 방 안에서. 그저 조용히 내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단단해진다.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눈물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세상이 뭐라 하든, 어른스러움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돌볼 줄 아는 용기다. 참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스스로의 감정을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니?”
그 질문 하나로 나의 하루가 조금은 달라진다. 아니, 내 삶 전체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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