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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공장

나의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by 오분레터

청주 북쪽 끝, 산등성이 아래 자리한 작은 공장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7년이 흘렀다. 아침이면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창으로 들이친다. 익숙하고 단조로운 날들이 반복되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별다른 불만 없이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제는 조금 다른 하루를 보냈다. 본사에서 예정한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로 향했다. 이른 새벽, 어둠을 뚫고 역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제공한 KTX 표를 들고 오랜만에 도시의 속도로 진입했다. 익숙했던 세계를 벗어난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교육장은 깔끔했고, 분위기는 차분했다. 열여덟 명이 각기 다른 조로 나뉘었고 나는 2조에 배정됐다. 대부분 본사 직원들이었고, 공장에서 올라온 사람은 나와 한 명뿐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는 같은 조였고 나란히 앉았다. 어색한 인사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자연스러워졌고, 오후가 지나갈 무렵에는 말끝마다 웃음이 섞였다. 교육을 마친 뒤 우리는 함께 여의도를 빠져나왔다. 낯선 도시에서 잠시라도 말벗이 있다는 건 은근한 위로였다.


돌아오는 길, 대화는 자연스럽게 운동 이야기로 이어졌다. 요즘 러닝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가 반색하며 물었다. “탁구는요?” “2년쯤 배웠어요. 요즘은 주로 뛰어요.” 그는 키가 컸고 농구를 즐긴다고 했다. 한때는 매주 농구장을 찾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 마음껏 시간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맞벌이 중이라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맡고 있다고 했다. 퇴근하면 운동 대신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이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보내는 하루가 호사로 느껴졌다. 나는 지금껏 퇴근 후 운동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저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가 다르기에 포기하고 감내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결혼 이후 줄곧 외벌이였다. 금전적으로 넉넉하진 않았지만 대신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큰소리 내지 않고, 바라는 말도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면 밤새 깨워가며 지켰고, 남편이 늦게 들어와도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운동도 하고, 가끔 글도 쓰며 내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나만 느긋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인내와 배려가 있었다.


가끔은 아내에게 운동을 권한다. 당신도 당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혼자 숨 쉴 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웃고는 이따금 동네 산책을 다녀온다며 짧은 바람만 쐬고 돌아온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너무 많은 것을 당연히 누려온 건 아닐까.


기차가 청주에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겐 꿈이라는 것. 내가 살아온 일상이 누군가의 부러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감사라는 말은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그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작고 고요한 시간을 자각하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말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될 것이다. 여전히 똑같은 공장, 익숙한 풍경, 반복되는 업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문득문득 그 말을 되뇌련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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