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지도’ 보며, 딸아이와 함께 걷는 여행
딸아이와의 일본 여행 작당은 2시간이면 충분했다. 22도의 비 오는 홋카이도 오타루인가?, 32도의 비 오는 교토인가? 2008년 아내가 공부하며 1년간 머물던 교토는 우리 가족에겐 애증의 도시였다. 아내에겐 다섯 살 딸아이를 한국에 두고 홀로 낯선 일본에서 1년을 버텨야 했고, 나에겐 엄마의 빈자리가 티 날까 어느 때보다 열심히 육아에 정진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2024년 이른 여름 아내는 티베트로 순례를 떠났고, 나는 세영이(딸)와 덥고 습한 교토로 찾아들었다.
2008년의 다섯 살 세영이는 어느새 2024년 20대 청년이 되어 교토여행 내내 든든한 가이드이자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하루카특급 열차를 타면, 1시간 20분 만에 교토에 다다른다. 공기도 플랫폼도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
세영이는 지난주 난생처음 일본 오키나와를 혼자 여행 다녀온 직후였고, 겁 없는 20대 여행자의 패기를 물씬 풍겼다.
16년 전처럼, 교토역 30번 플랫폼에 도착한 하루카 특급열차는 들뜬 표정의 여행자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교토다. 아내가 공부하던 2008년, 아이를 그리워하는 아내를 위해,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를 위해, 1년 동안 한 달 정도를 머물던 도시이다.
앞으로 8일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자세히 이 도시 구석구석을 걷고, 달리며 들여다볼 생각이다. 잠시 2008년의 여름 교토를 만나보자. 옛 사진첩에서 찾아낸 2008년 교토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여행 가방에 함께 챙겨 왔다. 젊고,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아내의 지도’는 외국 생활이 처음이었던 아내를 위해 자전거로 골목을 누비며 그렸던 ‘교토대학교 통학 지도’이다. 자전거 수리점과 식료품점, 자전거 통학 루트, 버스 노선, 외국인등록소, 맛집, 은행, 문구점 등이 담긴 나름 교토가 낯선 유학생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로 그렸다. 그때는 참 대단했지. 이런 지도를 그릴 생각을 다 하다니… 덕분에 이번 여행의 콘셉트가 정해졌다. 2008년 남편이 그린 ‘아내의 지도’가 2024년 딸아이가 따라 걷는 ‘엄마의 지도’가 된다.
이번 교토 여행에서 ‘에어비앤비’는 정말 멋진 선택 중 하나였다. 교토교엔(교토의 국민공원으로 불린다) 남문 바로 길 건너에 있어서 아침마다 교토교엔을 산책하고 달리기에 참 좋은 위치였다. 2~3명 정도가 머물기에 적당한 100년 넘은 3층 일본 고택(3층은 소방안전법?으로 사용을 못하도록 리모델링되어 있었다)으로, 호스트와의 소통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사려 깊은 환대가 느껴졌던 숙소로 꼭 추천하고 싶다. 위치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조도리와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했고, 집 앞에 비치되어 있는 숙소 자전거는 비 오는 교토 이곳저곳을 어슬렁 누비기에 요긴했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5박을 하고, 다음 숙소는 호텔로 잡았다. 교토역에 좀 더 가까워지고 교토역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메인 도로(지하철 Karasuma Line이 지나가는 도로)의 서쪽에 살짝 치우쳐 있어, 교토의 새로운 영역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다. 사실 여행기간(2024.7.9.~7.16.) 중에 일본의 3대 축제 가운데 하나인 ‘기온 마츠리’의 ‘요이야마(전야제)’가 있던 시기라, 일부 도로가 통제되었고, 새로 옮긴 숙소가 통제 구역을 벗어난 교토역 가까운 곳이어서 이동이 수월해 다행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교토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카페 탐방을 중심에 두고 코스와 일정을 잡았다. 물론 카페와 빵집 선택은 전적으로 세영이의 취향에 따랐다. 물론 누군가의 선행적인 추천을 참고하고 취향에 맞는 곳을 찾아간 것이니, 이 글도 또한 여러 리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의 호기심을 건드렸다면 다행이다. 구글맵 주소를 함께 표시해 두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교토역 내에 있는 ‘오가와 커피’는 산미 가득한 커피로 여행지에 무사히 도착한 방문객에게 개성 있는 도시 교토의 첫인상을 남긴다.
세영이가 여행 기간 중 두 번이나 찾은 동네? 빵집이다. 난 이번 여행을 통해 ‘식사빵’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어 즐겨 찾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기도 했으며, 빵을 사서 들고 나오는 세영이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던 카페였다.
교토 사람들의 주말 나들이 명소이자, 왕족들의 별장이 있었던 곳. 물과 산이 좋아 봄 벚꽃과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아라시야마를 비 오는 여름에 찾았다. % 아라비카 커피는 강물을 배경으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니 커피맛이 더 훌륭해진다.
일본의 명품 아웃도어 브랜드 ‘스노우피크’가 F&B형태의 쇼룸 형태로 선보이는 장소이다. 일본 전통 등에 프린트된 스노우피크 로고가 인상적이다. 오래된 일본 가옥을 리모델링해서 쇼룸으로 들어서려면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야 한다. 이때가 지친 발이 잠시 숨을 쉬는 시간도 되어 준다. 발바닥에 닿는 오래된 나무 마루의 느낌이 정겹다.
청수사(기요데미데라)를 휘리릭 둘러보고, 올라온 길과 다른 니넨자카 쪽 골목 내리막으로 접어들면 ‘아! 일본이다’ 싶은 스타벅스 간판이 보인다. 실내의 낮은 조도가 공간에 깊이감을 더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1,000년 전에 스타벅스가 있었다면 이런 모습일 듯~. 빈 자리를 기대 못한 채 2층을 둘러보다가 운 좋게 다다미 마루 자리를 잡아 앉을 수 있었다. 여행지에선 늘 그렇듯 우연히 마주친 발랄한 20대 한국 여행객들과 옆자리에 앉으며 잠시 수다도 떨고, 즐거운 여행 덕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비 오는 아침 동네 마실 가듯 편한 복장으로 찾아간 이노다커피는 정말 훌륭했다. 이곳은 동네 시니어들과 함께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유럽인 듯 일본인 듯 묘하게 체리색이 잘 어울리는 브런치 카페이다. 일본답게 유럽의 클래식한 화려함을 잘 정제해 담아낸 공간이다. 특히 푸른 산호초 색으로 치장된 유럽풍의 실외 분수가 멋스럽게 공간의 톤&매너를 맞추며 카페 내외부 공간의 매력도를 높여준다. 교토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잘 차려입고 나와 아침식사나 커피를 즐기는 시니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노다커피는 이미 굿즈 기념품숍도 공간 한 켠에 준비되어 있을 만큼 서비스부터 메뉴까지 짜임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토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모강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강이 Y자 모양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델타'라고 부르더라. 이곳 인근 동네 시장에 줄을 서는 일본 떡집이 있다. 여러 가지 떡들이 있지만 큼지막한 콩이 알알이 박혀 있는 하얀 떡이 인기가 제일 많은데, 우리나라의 시루떡의 동그란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맞을 듯 싶다. 일본 사람들은 이곳에서 떡을 사서 가모 강변으로 나가 떡을 먹으면서 담소를 즐긴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그랬다.
100년 넘게 같은 장소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교토의 장인 가게이다. 옆 공간과 지하 공간이 밤에는 Bar로 운영된다고 한다. 삶은 계란과 토마토 주스가 클래식한 메뉴의 일부가 되어 준다. 교토의 유명한 식빵 베이커리에서 가져와 토스트로 만들어 판매하는 거라는데, 세영이는 우리 동네 '카페연제' 쌀식빵이 더 맛있다고 그러더라. 나도 인정! 그래도 이곳 토스트 식빵은 쫀득한 식감으로 내가 좋아하는 질감을 갖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얼마전 '놀면뭐하니'에서 소개된 곳으로 충북 옥천에 풍미당 '물쫄면'이 있다면, 일본 교토에는 '물팥빙수'가 있으려나.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생소한 비주얼의 녹차물에 말아먹는 팥빙수를 주문해 보았다. 맛은 예상 가능한 맛! 어딜 가나 당고는 기본이고요.
전통의 도시에서 친환경 생태친화 도시로 브랜딩을 강화하고 있는 교토에 참 잘 어울리는 콘셉트의 카페이다. 덜어서 파는 식재료와 로컬 음료(알코올), 건강한 식재료를 참신하게 담아낸 건강 밥상 차림까지 갖췄는데 공간의 분위기는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잘 반영한 듯싶다. 앉아서 식사하는 동안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의 방문이 많았다. 직원도 외국인 남성 2명에 일본인 여성 1명으로 업장 크기에 비해 많았다. 매출이 잘 나오는 곳인가 보다. 매장 입구를 앉아서 쉬거나 음료를 즐길 수 있도록 소파와 테이블을 배치해서 편안한 분위기로 연출한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주말 일정으로 잡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월요일) 일정으로 변경해 다녀온 교토 외곽(교토역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위치한 '액자정원'으로 유명한 '호센인'이다. 몇 년 전까지 일본사람들만 찾던 외진 곳이었는데 얼마전부터 관광객에게까지 알려지면서 이제는 제법 찾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구글맵으로 찾아갔어도 입구를 찾는데 조금 애를 먹었을 정도로 아직은 대중적인 관광지는 아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입장료가 있는데, 마루에 앉아 액자정원을 감상하다 보면, 예의 바른 직원분께서 무릎을 꿇고 차와 떡을 내어 놓고 가신다. 우리가 갔던 날은 월요일에 비도 추적추적 오는 날이어서 그런지 이곳의 고요한 정취를 충~분히 느끼고 돌아올 수 있었다.
교토 여행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카페이다. 자연광이 부드럽게 들어오는 창이 넓고, 의자와 테이블이 가구 디자이너에게 주문한 듯 같은 모양이 없었다. 카레 베이스의 상차림이 입맛에서 딱 좋았다. 설치미술처럼 걸려 있는 모빌형 등기구도 맘에 들고, 소지품을 담아 옆에 둘 수 있도록 친환경 느낌의 바구니를 둔 것도 주인장의 센스다. 같은 이름의 호텔 1층 공간에 위치해 있는 CAFE MALDA는 카페가 입소문이 나면서 덩달아 호텔까지 유명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카레밥으로 식사를 하면서 함께 곁들였던 스파클링 와인을 잊을 수가 없다. 덥고 습한 교토의 날씨 속을 5시간 걷고 난 이후에 마시는 스파클링 와인은 입가에 미소를 절로 짓게 해 주었다.
교토의 카페를 탐방하면서 먹고 마신 빵과 커피로는 50대 아저씨의 밥심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틈틈이 세영이와 함께 대부분은 혼자 숙소에서 나와 X세대가 좋아할만한 음식들을 찾아 교토를 어슬렁거렸다. 다녔던 곳 전부를 담았지만, 어느 곳 하나 섭섭했던 적은 없었으니 교토 여행을 생각 중인 X세대라면 참고하시면 좋겠다.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가 추천해 준 숙소 근처 이자카야이다. 교토 도착 첫날 맘껏 일본의 맛을 느껴 보고 싶었던 터라, 오픈 전부터 기다려 들어갔던 식당이다. 선어회와 어묵, 나마비루까지 이만하면 충분히 흡족했다.
엄마와 아빠, 아이가 함께 먹는 '오야꼬동'이다. 일반 서민들의 대표 메뉴인 듯한데, 교토교엔을 지나 비 오는 거리를 자전거로 어슬렁 다녀온 곳이다. 우연히 구글맵에서 찾아낸 나만의? 교토 맛집이다. 오픈하자마자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어서 퇴근길 일본인 여성들이, 동네 노부부로 보이는 분들이 들어온다. 동네 맛집 맞나 보다. 계란덮밥이라고 불러도 좋을 모양새이다. 오래된 노포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식당을 찾은 듯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교토의 골목길을 어슬렁 거리다 일본이면 온천이지 싶어 유명 온천 대신 동네 공중목욕탕에 갔다. 목욕탕 스토리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암튼 온탕, 냉탕, 사우나를 서너 차례 반복하고 개운한 느낌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맞은편 골목 식당에 손님들이 가득한게 눈에 들어왔다. 구글맵으로 찾으니 소문난 현지인의 소바 맛집이란다. 이미 저녁은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라멘집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먹어보나 싶어 무조건 문을 열고 들어갔던 식당이다.
'이치란 라멘'을 찾아가 보려 했지만, 인근에 없었고 무엇보다 프랜차이즈 라멘맛 대신 동네사람들이 인정하는 동네 라멘 고수의 집을 찾아보고 싶었다. 호텔 카운터로 가서 근처 라멘 맛집을 추천받아 찾아간 곳이다. 오픈 10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15명 정도가 줄을 서고 있었다. 현지인들과 관광객이 반반 정도 섞여 있는 줄로 보아하니 이미 SNS에도 소문난 동네 라멘 맛집인 모양이다. 특이했던 점은 줄을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 자판기로 메뉴를 고르고 결재하면 쿠폰이 나오고, 이걸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줄을 서고 있으면 직원이 나와 이를 걷어 간다. 뭐가 이리 복잡하지 싶은데 암튼 여긴 그런가 보다. 단체 손님 사이에서 혼자 하는 식객은 구석자리로 안내되기 쉬운가 보다. 오늘도 제일 안쪽 편안하게 자리잡고 미친 듯이 미소라멘과 기린라거 맥주를 연거푸 흡입하고 나왔다. 뿌듯했다.
일본의 3대 축제 가운데 하나인 교토의 '기온 마츠리'를 포기하고 찾아간 교토 꼬치구이 맛집이다. 비 오는 궂은 날씨에 수십만의 인파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오히려 평소 같으면 예약이 필수인 줄 서는 맛집에 후다닥 찾아가 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구석 빈자리가 하나 났다. 이런 행운이... 일본의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앉아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밤에 누린 나만의 호사스러운 저녁이구나.
2008년 세영이와 함께 교토에서 공부하던 엄마를 보러 오던 날. 그리고 16년 후 다시 찾은 교토에서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세영이만 훌쩍 커버린 느낌이다. 다섯 살 세영이는 사진 찍는다고 포즈 취하라면 온갖 귀여운 표정을 다 지어주었다. 20대 청년 세영이는 아빠가 사정해서 겨우 설정샷을 완성할 수 있었다. 휴우~~ 어쨌든 완성해서 다행이다.
영상이었으면 더 좋았을까? 생생함은 덜하더라도 상상하게 만드는 사진이 더 편안하다. 일상의 에너지가 튀어 오르는 순간을 사진에 담는 내공을 매주 '동네소년단'을 통해 길러 왔던 터다. 지금부터는 교토 카페 여행 틈틈이 나름의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주었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으로 이번 교토여행을 함께 즐겨보자.
비 오는 교토를 뛸까 어쩔까 고민하다, 그냥 자전거로 교토의 골목을 누벼보자고 나섰다.
액자정원을 보러 '호센인'에 갔을 때, 소개 책자에 담겨 있던 글귀가 여행 후에도 생각이 많이 난다.
여행 기간 SNS를 멈추고, 4년만에 개인 충전의 시간으로 삼아보려 했지만,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여행에서 무언가 대단한 걸 얻어야지 하는 생각은 마땅치 않다. 일상의 삶 속에서 지치지 않게 심신을 잘 단련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행 같은 일상으로 남은 반세기 건강하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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