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잡담록:
EP.01 제안서 첫 줄이 안 써지는 날

by 동네소년


3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청주 사무실, 마감은 내일 오전. 화면엔 제목 하나만 있고, 커서는 두 시간째 같은 자리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방송 26년이다. 기획안 수백 개를 써왔다. 이 정도면 첫 줄쯤은 눈 감고도 나와야 하는데. 눈 감으면 더 안 써진다는 걸 그날 또 확인했다. 머릿속엔 다 있었다. 왜 이 사업이 필요한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근데 그게 문장이 되질 않았다.


이게 나름 자주 있는 일이다. 그날은 그냥 AI한테 던져봤다. 지금 이런 사업 기획 중인데, 배경이 이렇고, 목적이 이렇다. 첫 문장 써봐. 3초 만에 뭔가 나왔다.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교과서 같고, 내 색깔이 없었다. 살짝 안도했다. 더 잘 써줬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서. 근데 그 문장을 읽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뭉쳐있던 것들이, AI가 뱉어낸 엉성한 문장을 거울 삼아 윤곽을 드러냈다. 아, 나는 이걸 말하고 싶었구나. 그날 제안서 첫 줄은 10분 만에 썼다.


방송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인터뷰이가 말을 못 이어갈 때, 진행자가 엉뚱한 질문을 던지면 오히려 정확한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틀린 말에 반응하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오는 것이다. AI가 그 역할을 했다. 대신 써준 게 아니었다. 내 말을 꺼내준 것이었다. 쓸모없는 문장이, 쓸모가 있었다.


구글맵이 스와시 스타벅스를 찾으러 갔다가 고속도로 옆 건물 뒤편으로 등산을 시킨 적이 있다. 낡은 철문을 열고, 싱글 트랙 같은 길을 100미터 올랐다.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올라가면서 스와호 풍경이 잠깐 보였다. 구글맵이 이런 길을 안내해 줬다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AI도 그런 것 같다. 가끔 엉뚱한 길로 데려가지만, 그 길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써보고 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막혔을 때 뭔가 건네줬고, 도움이 됐다. 그뿐이다. 방송국 26년차 동네소년의 적응기. 잘 될 때도 있고, 황당할 때도 있고, 가끔 기분 나쁠 때도 있다. 그 모든 순간을 기록해볼 생각이다.





"동네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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