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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생 Dec 01. 2021

서랍장 냄새 속에 할머니가 있다.

긴팔 잠옷을 꺼내 입은 날

    

 

 서랍이나 옷장에 있던 옷을 꺼내 입었을 때 향긋한 섬유유연제 향이 나면 기분이 좋다. 독립을 하고 엄마의 취향이 아닌 내 취향으로 고르게 된 후에는 더 좋아졌다. 특히, 계절이 바뀔 때 옷장 정리를 하며 새로운 계절의 옷을 꺼낼 때 섬유유연제 향이 남아있으면 기분 좋음이 또 추가된다. 새로운 계절에 대한 설렘에 좋은 향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냄새에는 기억이 담긴다. 여전히 스테디셀러인 더 바디샵의 화이트 머스크 향을 맡으면, 그 향을 한창 좋아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떠오르고, 딸기향 바디제품 향을 맡으면 고등학생 때의 내가 떠오른다.


 최근 쌀쌀해진 날씨에 옷장에 넣어두었던 긴팔 잠옷을 꺼내었다. 기대했던 섬유유연제 향은 아니고 조금 구수한 서랍장 냄새가 난다. 서랍장 냄새가 나는 잠옷을 입고 누웠는데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정확하게는 외할머니 집에서 덮던 이불 냄새가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혼자 사셨는데, 깔끔한 성격이라 늘 집이 깨끗했다. 늘 정돈되어있고 바닥도 보송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청소년기에는 방학이면 할머니 집에서 며칠씩 지냈다. 그때 할머니가 내어주신 이불에서는 나프탈렌 냄새와 서랍장 냄새가 나곤 했다.


 할머니는 혼자 사셨지만 명절이나 손주들이 가서 잘 때를 대비해서인지 이불이 여러 채 있었고, 이 이불들은 우리가 갈 때만 바깥 구경을 하던 친구들이라 장롱 냄새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셔서 할머니 집 장롱 속 이불들은 엄마 집으로, 이모집으로 아니면 그대로 할머니 집 장롱 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나도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못 뵌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변이를 거듭하며 우리를 위협하는 역병 속에 면회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가끔 요양보호사 분들이 보내주는 사진 속에서 야위어 가는 할머니만 만날 수 있다. 생각하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리는 할머니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꺼낸 긴팔 잠옷에서 나는 서랍장 냄새에서 만났다. 서랍장 냄새 속에 손녀가 차내는 이불을 덮어주고, 아빠라고 하지 말고 아버지라고 하라며 잔소리하던 할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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