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회색의 지하철에서

by 꿈꾸는오월

서울의 지옥철이 싫었다.


밥벌이로 상경한 내게 지옥철이란 또 다른 세계였다. 강남으로 출퇴근하는 대도시의 직장인이 되었다는 약간의 자부심은 잠시였을 뿐. 뉴스에서만 보던 ‘지옥철’을 매일 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타는 압박감, 여름날은 불쾌감까지. 서로의 숨소리마저 느껴지는 밀착된 거리. 무표정한 표정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밀치거나 부딪힐 때마다 돌아오는 따가운 시선들에 마음까지 눌리는 느낌이었다. 하차할 때면 깊은 물 속에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의 하루는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다. 매일 아침의 8호선 9-3번 열차 칸. 이제는 익숙해진 무채색의 출퇴근길. 채도 하나 없는 이 적막한 지하철에 나도 이젠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올라탄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도, 꽤 중심을 잘 잡고 버티고 있다. 그러려니 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회색빛 지하철 안에서 뜻밖의 다정함을 만났다. 그날따라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탄 빽빽한 2호선. 선반도 없는 지하철 안에서 가방을 잡고 위태롭게 관성을 이겨내고 서 있는 순간, 누군가 내 가방을 잡아당겼다. 앞 좌석에 앉은 한 아주머니께서 가방을 가져가려고 하셨다. 놀란 시선의 끝엔 아주머니께서 미소로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손짓을 보내고 계셨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아주머니는 결국 가방을 가져가셨다.


“무거워 보여서 그래요.”

가방은 아주머니의 무릎 위에 앉았다. 덕분에 손이 자유로워져 편히 갈 수 있었다. 잡고 있던 손잡이가 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순간 열차 안이 밝아진 느낌도 들었다.

하차할 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는데, 그 인사마저 괜찮다며 만류하시는 아주머니. 별말 없이 건넨 손길과 미소가 그날의 하루를 채웠다.


며칠 뒤엔, 또 다른 다정함이 나를 멈춰 세웠다. 심하지 않은 발가락 골절을 진단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았던 날. 통증이 크지 않았고 잠깐 다녀올 거리라 깁스를 뺐다. 그런데 잠실역에서 도착하자 발이 아파져 걸음걸이가 무너졌다. 그래도 곧 내릴 거라 10분만 참자는 생각만 했다.


잠실역 환승구간, 한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오셨다.

“다리를 저는구먼.”

내 얘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딱 보면 알아. 다리 삔 거지?”


얼떨결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더니, 그 말을 시작으로 할아버지는 내 다리를 걱정하시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다리를 다쳐 걷기 힘든 안타까운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환승역 구간 내내 할아버지는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손주 같아 걱정이라는, 다리는 인생의 근간이니 다리를 고치면 내 인생이 180도 바뀔 거라는 인생의 조언이 돌아왔다. 당신께서도 다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 고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어디까지 가는지, 많이 아픈지도 확인하셨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위해 다리는 꼭 고쳐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그 복잡한 공간에 걱정의 온기가 번졌다.


회색빛 지하철의 명암이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무거운 짐을 기꺼이 나눠 들어주는 낯선 사람들, 말없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이들. 말보다 앞서는 배려와 조용한 손길의 다정함이 모여 회색의 공간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바쁜 출퇴근길 사이에도 따뜻한 순간은 틈을 만들어 존재해 왔다.


오늘도 나는 회색빛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여전히 빽빽하고, 또 무표정한 얼굴들로 가득 찬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도 작은 배려들이 보인다. 승하차할 때 비켜주는 몸짓, 조심스레 건네는 시선들. 아주 작고 사소한 다정함. 그런 순간들이 모여 하루의 시작, 이 회색의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