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책 주제를 바꿀게요.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by 꿈꾸는오월

“저는 여행기를 써볼까 해요, 찍었던 사진이랑 같이 내어서 여행을 한번 정리해 보려고요”


독립출판 수업 첫날, 꽤 자신 있게 대답했었다.

그때만 해도, 여행을 주제로 하면 자연스럽게 글이 나올 줄 알았다. 틈틈이 사진도 찍어두었던 터라 글과 함께 편집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사진첩을 열어보니, 몇 장의 풍경 사진, 그것도 다시 보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일기와 메모도 책이 될 만큼의 글이 쌓여있지 않았다. 다시 그때를 떠올려 글을 써보려고도 했는데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2주 후, 책 기획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행기'만 붙잡고 있었다. 다른 주제는 떠오르지 않았고, 마음 한편엔 묘한 불안만이 자리했다. 어느새 '내가 여행 이야기를 정말로 쓰고 싶은 걸까?' 하는 질문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발표 날, 다른 사람들의 기획을 들으며 불안은 확신이 됐다.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해 보였다. 퇴사 후 새로운 시작, 오래된 취미에 관한 이야기, 혹은 감동적인 사연이 있었다. 그들의 주제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분명했고, 각자만의 시선과 서사가 있었다. 그 앞에 여행기라는 무성의하고, 혹은 희미해 보이는 내 대답은 작아 보이기만 했다.


나는 쓸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그때 알았다.

나는 여행기를 쓰고 싶었던 게 아니라, 책을 써야 하니까 적당한 주제를 골랐던 것뿐이라는 걸.


책으로 쓸 이야기가 없다.

집으로 돌아온 그때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행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주제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게 무언가 쓸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여유로운 주말 오후, 노트와 펜을 가지고 카페로 향했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손으로 적어보기로 했다.


나이, 사는 곳, 가족 관계와 같은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서, 취향과 취미, 습관까지도. 그중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영역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커피가 줄어들수록, 종이는 조금씩 채워졌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다 보니, 의외로 많은 것들이 쌓이면서 쓸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나의 하루와 시선, 그리고 지극히 사적이지만 누군가와는 닮아있을 나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라는 그 모든 교집합의 중심에, 하지만 누군가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그리고, 여행기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주제로 눈을 돌렸다. 어느 순간, 내가 쓰고 싶은 주제를 잡고 나니 어떻게 써야 할지도 조금씩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책 한 권을 만드는 것이, 어쩌면 나를 되찾는 과정은 아닐까 생각했다. 잊고 있던 내 모습과 내 취향,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 속 무심히 지나쳤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날 수는 있으니까. 모든 것이 글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기록의 동력도 되었다.


어른들이 종종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시던,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소설책 서너 권은 나온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책은 완성된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과정을 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독립출판은 그 여정을 담아가는 일인 것 같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음 시간, 나는 손을 들어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책의 주제를 바꿨어요. 시간이 촉박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촉박할지라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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