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신과 선명함은 비례한다.

by 황금지기


파울루 코엘류가 「연금술사」에서 노래했듯, 모래사막은 메마른 갈증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시험하지만, 그 고통의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만이 끝내 생명의 오아시스를 대면할 자격을 얻는다. 우리가 마주한 시대를 불안정(Volatility)하고 불확실(Uncertainty)하며, 복잡하고(Complexity) 애매모호한(Ambiguity) 'VUCA'의 사회라고 말한다. 이는 곧 자본 시장의 본질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오로지 확률로만 움직이는 이 복잡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역설적으로 ‘단순화’에 있다. 시장이 복잡하고 모호할수록, 우리의 원칙은 더 단순하고 명료해져야만 비로소 앞길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시장을 자신만의 단순계로 이해시키려는 치열한 사투, 그리고 그렇게 정제된 원칙을 뇌리에 각인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거듭될 때 자기 확신이라는 퍼즐이 완성된다. 파동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깊어지고 사색의 시간이 쌓이면서, 투자자의 미래를 향한 흔들림 없는 확신은 서서히 지속성을 담보 받게 된다. 결국 매매한다는 것은 자기 확신을 검증하는 시험장이자,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존엄한 자유에 대한 무한긍정이 바로 자기 확신의 본질이다. 투자를 통해 꿈을 꾼다는 것은 사막을 건너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여정과 같으며, 그 오아시스는 결국 외부가 아닌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자기 확신은 내면의 오아시스로 안내하는 지도다. 시장이 복잡할수록 원칙은 어린아이의 언어처럼 단순해야 한다. 복잡함을 걷어내고 남은 명료한 태도가 당신을 오아시스로 인도할 것이다.




존 호머 밀스는 “삶이란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고 했다. 투자의 성패 역시 눈앞의 현상에 대응하는 투자자의 태도에서 갈린다. 지수가 하락하는 구간에서 중수는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잡으며 크게 잃지는 않으나 고전분투하는 반면, 상수는 ‘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여유를 더한다. 박스권의 데이트레이딩에서도 중수는 상단과 하단을 오가며 부지런히 방어하지만, 상수는 에너지가 응축될 때까지 기다려 가장 쉽고 큰 수익을 낚아챈다.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FOMO)를 넘어선 상수에게 시장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장이다.


후회의 본질을 ‘선택에서 실제 결과를 뺀 값’으로 정의할 때, 하수일수록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비대하다. 그 비대함 때문에 조금만 나쁜 결과는 물론, 심지어 조금 좋은 결과조차도 커다란 후회로 치환되어 버린다. 결국 하수는 후회가 두려워 손실을 끊지도, 원칙을 지키지도 못한다. 후회를 ‘정서적으로 원하는 것과 실제로 가능한 것의 차이’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하수는 실제로 가능한 영역을 무시한 채 정서적 갈망에만 매몰되기에, 작은 후회조차 회피하려다 결국 후회의 깊은 늪에 빠져 소중한 자산을 잃고 만다. 상수는 기대치를 현실에 맞춤으로써 후회의 무게를 덜고, 그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기회를 포착한다.


후회는 기대치가 만드는 환상이다. 실제로 가능한 수익보다 정서적으로 원하는 대박에 눈이 멀어, 마땅히 끊어야 할 손절의 순간을 후회의 공포 뒤로 숨기고 마는 것이 비대한 기대치다.




해외선물 시장에서 증거금의 3분의 1 수준(Lower Leverage = 0.3)으로 운용 규모를 낮추면, 투자자는 손실을 덤덤하게 수용하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심리적 여유를 얻는다. 이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이 투자 심리의 핵심이며, 이는 우리 인생의 산인 이등변 삼각형의 왼쪽 아래 꼭짓점을 형성한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 꼭짓점은 ‘추격하지 않는 절제’다. 원칙으로 정한 지점까지 조급함을 누르고 기다릴 수 있다면, 비로소 투자의 정수인 기다림의 미학을 체득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습관으로 체화할 때, 삼각형의 밑변인 두 점은 연결되어 하나의 단단한 직선이 된다. 이 직선은 돈과 심리가 마침내 동일선상에 놓였음을 의미하며, 성급함을 극복하고 그토록 고대하던 ‘수확의 계절’인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선언하는 이정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낮은 레버리지를 유지하며 추격 없이 기다리는 투자자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잃지 않는 법을 완성한 자에게 수익은 시간의 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다.


밑변이 견고해지면, 그 위로 흐르는 시간은 또 다른 꼭짓점을 향해 높이를 올리며 누적 수익을 쌓아간다. 동일선상 위에서 더해지는 시간은 투자자에게 경험적 통찰(Ex-insight)을 선사하고, 그 깊어진 통찰은 수익의 누적을 산처럼 높이 일구어낸다. 이것이 시장에서 스스로 깨친 성공의 공식이다. 이 이등변 삼각형은 투자자가 고독하게 버티며 쌓아 올린, 각자 인생의 숭고한 산(山)이다.


밑변이 흔들리면 쌓아 올린 산은 무너져 내린다. 수익의 높이는 투자자가 억지로 조절하고 탐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게 다져진 밑변 위에서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 올리는 것이다.




니체는 “당신이 가장 피하고 싶고 불편해하는 그곳에 평생토록 바라온 보물이 숨겨져 있다”라고 일갈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편하지만, 바르게 마음을 먹는 것은 불편하다. 무언가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더더욱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원칙들로 삶을 채워갈 때 인생은 비로소 깊어진다. 내 고집대로 가려는 마음을 꺾고, 시장이 오는 대로 그 흐름을 따라가는 마음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투자자에게 최고의 축복이다.


잔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의 반짝임을 ‘윤슬’이라 부른다. 우리네 삶도, 투자도 끝없이 일렁이는 잔물결에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그 흔들림이 있기에 우리는 빛나는 윤슬이 된다. 시장에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은 오만이며, 흔들림을 외면한 채 얻으려는 수익은 물거품 같은 꿈이다. 물결이 일렁이지 않으면 윤슬도 없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은 현재를 갉아먹을 뿐이다. 과거는 알 수 없었기에 흘러간 것이고, 미래는 알 수 없어야 하기에 신비로운 것이다. 감정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건 각자의 마음 먹기다. 마음먹기에 따라 자주 반짝이는 윤슬이 된다.


불편함을 기꺼이 품을 때 비로소 보물 창고의 문이 열린다. 어지러운 파동(難波) 속에서 인생이라는 배가 부서지는 난파(難破)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 불편한 원칙의 집행과 반드시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관통하며 단단해진 심리라면 어떤 광풍 속에서도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확률의 세계에서 열 번 중 여섯 번의 성공이면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진실은, 틀린 네 번의 실패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전제될 때만 나머지 여섯 번의 수익이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거듭되는 틀림을 수용하라. 그것이 성장을 위한 단 하나의 필수 관문이다. 시장의 흔들림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눈부시게 빛내러 온 것이다.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김영하, 여행의 이유>


투자는 결국 이 보이지 않는 허깨비들을 다스리는 심리 게임이며, 투자자는 그 마음을 가꾸는 정원사여야 한다. 투자의 현명함은 곧 자신의 ‘생각하는 마음’을 통제하는 기술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끝없이 고개를 쳐드는 탐욕을 망치로 내려치고,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허깨비들을 마음의 문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이 과정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몸의 때를 밀듯 마음의 잡초를 뽑아내는 성실한 반복만이 우리를 조금씩 더 현명하게 만든다. 완벽한 통제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통제의 시작이다.


물속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상상해 보라. 인간의 마음도 그 나무와 같아서, 감정의 밀물과 썰물에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흔들리는 마음이 시장의 거친 파동을 만났을 때, 대다수는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만다. 그러나 중심을 잡으며 단단하게 뿌리 내린 소수만이 비로소 세월을 이겨낸 고목이 된다. 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흔들리는 파동을 만났으니 대개 결과는 뻔하다. 흔들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자만이 시장이라는 숲과 하나가 된다.


자신에 대한 통제가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가르는 선이다. 현명함은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다듬는 정원사의 부지런함에서 나온다.




아인슈타인은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 말했다. 매번 똑같은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고 과거와 다름없는 매매를 반복하면서, 막연한 수익을 기대하는 그 미친 짓을 끝내고자 하는 결단이 투자의 진정한 시작점이다. 원칙을 사수하겠다는 기술적 의지, 감정의 파도에 쓸려 보내지 않겠다는 충만한 의지가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원칙을 지키는 기술이 곧 ‘잃지 않는 기술’이다. 불확실성으로 자욱한 시장의 원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우리가 다루는 돈 그 이상의 고귀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대다수 투자자가 이 핵심적인 구간을 건너뛰고 오직 수익만을 탐하기에, 정작 본인의 매매에는 신뢰를 주지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근심만 가득 채우게 된다. 잃지 않는 기술의 요체는 평상심이라는 초심을 유지하는 데 있다. 잃지 않는 법을 익힌다는 것은 투자라는 묘목이 비로소 깊게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다. 뿌리만 견고하다면 나무가 자라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또한, 잃지 않는 기술은 성급함과 욕심을 부단히 비워가는 기술이기도 하다. 비워야만 비로소 새로운 것이 채워지듯, 잃지 않는 기술은 그 안에서 ‘수익 내는 기술’을 잉태한다.


비워냄이 곧 잃지 않는 기술이며, 그 자리에서 비로소 ‘수익 내는 기술’이 잉태된다. 성장은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의 깊이로 결정된다. 이 인고의 시간을 통과할 때 한 명의 진중한 투자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에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의 총량’에 최대한 다가가는 것, 그것은 각자에게 부여된 운명의 명령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해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속에는 결국 나쁜 것이 많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나쁜 것들은 쉽고 중독성이 강해 유혹하지만, 정작 좋은 것들은 행하기 어렵고 반복하기조차 버거운 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실체다.


손이 쉽게 가는 술과 담배, 감정에 휘둘린 뇌동매매, 그리고 더 자고 싶고 편하고 싶은 나태함은 지금은 달콤할지 모르나 결국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들이다. 반면 고된 운동과 새벽의 사색, 그리고 원칙을 지키며 뚜벅뚜벅 나아가는 의지는 결국 좋은 것이지만 지속하기가 무척 고통스럽다. 결국 좋은 것을 지속하는 의지의 차이가 인생의 깊이를 판가름하겠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이 아니라 ‘균형’이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유혹과 하기 싫은 가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며 그 무게추를 좋은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과정 자체가 투자의 본질이자 삶의 지혜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좋은 방향을 선택하는 그 노력이 운명이 명한 좋은 것들의 총량으로 인도한다.




말이 많은 것은 이미 전부를 알고 있는 신을 짜증 나게 할 뿐이다. 말하는 대신 묵묵히 행하는 수고로움을 택할 때, 그 인내의 부피만큼 마음은 단단해진다. 적게 말함으로써 단단해진 언어, 행함의 수고로움으로 단단해진 말만이 타인의 귀에서 가슴으로 꺾여 내려가 깊은 의미가 된다.


사람이 화를 내는 본래 목적은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바꾸고자 함이다. 그러나 화를 자주 내는 것은 그 목적을 스스로 파괴하는 어리석음이자 자기모순이다. 잦은 화는 청자의 가슴으로 꺾이지 못한 채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빠르게 통과해 흩어질 뿐이다. 드물게 화하는 자의 목소리는 새로워서 가슴을 울리지만, 습관적으로 화하는 자의 목소리는 소음이 되어 외면받는다.


원칙도 드물게 어기는 자에게 원칙 위반은 뼈아픈 경험이 되어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만, 자주 어기는 자에게 원칙은 이미 원칙이 아닌 것이 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실수는 실천의 증거라지만, 그 횟수가 임계점을 넘으면 그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다. 아껴두고 곱씹을 문장이 없어 가슴으로 꺾이지 못하는 글이 쓸모없듯, 자주 어겨서 무게를 잃은 원칙 또한 쓸모가 없다. 한 손에는 창을, 다른 손에는 방패를 든 채 승부를 보겠다는 모순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칙을 어기면서도 원칙을 강조하는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모순의 균열 사이로 조금씩 변화의 빛을 끌어들이는 것만이 투자자가 가야 할 길이다.


고쳐지지 않는 실수는 실력이다. 가슴으로 꺾이지 않는 언어는 힘이 없듯,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원칙은 허상일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중략)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인간은 화려한 언변이나 장밋빛 계획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 규정되는 존재다.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행동으로 끊임없이 증명하며 성장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시장은 우리의 의도를 묻지 않으며, 오직 실행한 원칙의 궤적만을 기록한다. 우리는 주어지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행위를 한 층씩 퇴적시켜 나가는 존재이며, 그 지층이 곧 스스로 개척한 운명의 지도가 된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마주한 유일한 숙제는, 불안과 후회라는 허상을 걷어내고 오늘 하루의 원칙을 정직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평온은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가 만든다. 지금이라는 캔버스 위에 원칙이라는 정직한 붓질을 남겨갈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근접한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운명 그 자체는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든 우리의 선택이다. 행복이 '결과에서 기대치를 뺀 값'이듯, 성공 역시 태도에 달려 있다. 투자에서의 성공은 결국 원칙을 지키는 기술로 결정되며, 그 기술을 연마하겠다는 의지 또한 마음먹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마음먹게 달렸어…,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원칙을 지키는 일이 만약 쉬웠다면 시장은 지금처럼 매혹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이 어려움이야말로 투자의 진짜 가치다. 어려울수록 파고들 가치가 있고, 그 고통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투자는 고역이 아닌 재미가 된다. 후회와 아쉬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조금씩 희석해 나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렵기에 재미있고, 흔들리기에 빛나는 것이 투자다. 선택이 거듭되면 결과는 필연으로 다가오지만, 그 필연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인생은 천차만별의 풍경을 그려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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