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복잡하면 부러지기 마련, 과정을 거듭하면서 단순해져야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파동은 변한다는 파동의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속성을 이해하고 생각을 죽이면서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한, ‘원칙을 지키는 나’를 만나기 위한 준비가 공부다. 멈추지 못한 명확한 실패는 경험을 일그러진 영웅으로 만들기에 무슨 일이든 멈추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 대부분 투자자는 기계치여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 만족하지 못해 투자하게 되면 스스로와 잘 지내는 게 어렵다. 투자자의 합리는 챙김과 같은 방향이다.
원칙마다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정해지는 법인데 자꾸만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그 욕심으로 인해 원칙은 자주 부러진다. 투자자마다 장단점이 다른 법이기에 자신에게 맞는 원칙을 만들고 다듬어가야 하지만, 원칙이란 게 원래 단순함으로 정제되기 전에는 자꾸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복잡함이 더해지면서 필연의 흔들림으로 너무나도 쉽게 부러진다. 지극히 인간적이기에 과정에서 원칙의 부러짐은 (실패들은) 필연이다. 어떤 이는 포기하고 떠나고, 어떤 이는 포기하지 못해 끝없이 망가지고, 어떤 이는 ‘원칙을 지키는 나’로 건너가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과정을 거듭하면서 단순하게 정제된 원칙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또 다른 나’로 건너가기 위한 노력의 가치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는 도구로 투자만 한 게 또 어디에 있겠는가!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함을 강조한 모건 하우절이 「불변의 법칙」에서 제안한 것처럼 투자자는 변하는 것보다는 변하지 않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장에서 파동이 변한다는 건 파동의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즉 변하지 않는 속성인 파동은 변한다는 걸 인정해야 기다림으로 미학을 논하고, 대응으로 예술을 행하게 된다. 파동은 등락하면서 변하므로 투자자는 파동을 그려야 한다. 파동을 그리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에 순응하게 되고 인생도 변하게 된다. 군중은 좀처럼 변화를 인정하지 않기에 변동성은 불확실성과 더불어 시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가 되고, 소수로 가는 길은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변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스스로 인정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도, 변화에 순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흐름이 맑고 따스하면 매수하고, 시장의 흐름이 흐리고 차가우면 매도하고, 그럼에도 흐름이 바뀌거나 잘못 보았다면 변화를 읽고 대응하는 것 그뿐이다.
확률로 설명될 수밖에, 예측은 그저 그런 예측일 수밖에 없으므로 시장에서는 운이 상당 부분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객관적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에는 투자의 성과가 내가 아니라, 운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시장을 ‘완전히 달라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기 생각이 강할수록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기 어려워지므로 객관적 시선은 생각 죽이기와 유사어다. 운을 인정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흐름에 순응할수록 겸손하게 되고, 겸손해질수록 생각이 흐름에 개입할 여지는 적어진다. 각자의 생각과 시장의 흐름에는 전혀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기에 보이는 대로 보기 위해서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생각을 버릴수록 흐름이 선명해지게 된다.
관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다. 관점은 투자자가 시장을, 파동을 보고 다루는 기본적인 틀이기에 틀이 단단해야 원칙이 바로 설 수 있게 된다. 원칙을 단단하게 고정해 둘 동아줄과도 같은 관점은 지식으로는 단단하게 고정하기 힘들고, 경험으로 굳은살이 배어야 단단해지기에 지식이 지혜로 정제되는 경험의 시간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배우고 익히면서 자생력을 갖추어가는 필연의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건 변한다’라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그나마 짧아진다. 일관되게 반복하는 건 관점이 굳게 뿌리를 내린 상태에서의 원칙이 하는 것이지, 서툴고 오류투성이인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다. 마음은 감정적이고, 꾸준하지 않고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기에 마음 너머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이, 그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이 (나무가 뿌리는 내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더디기에 1%만이 시장이란 울창한 숲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좀 더 잘 반복하기 위해서는 갈대 같은 마음의 흔들림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스스로 절차의 정당성이 있어야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게 인간의 마음이지 않겠는가! 스스로 세운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원칙을 지키는 나’를 만나기 위한 준비가 공부다.
파동은 등락한다는 관점을 명확하게 정립하고 파동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실수는 (너무나도 자주 언제든지) 등락하는 마디마디에서 유리한 방향을 잘못 본다거나, 잘 보았더라도 확률적으로 어긋나거나,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거나 등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며 결국에는 경험하면서, 깨치면서 감각으로 승화된다.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지 않는 작은 실수들은 그렇게 성장의 양분이 된다. 경험은 실수를 통해 선명해지는 법이다. 반면에 명확한 실패는 첫째 등락하는 마디의 고점에서 매수하거나 저점에서 매도하는 것이고, 둘째 손실을 짧게 자르지 않는 것이다. 실패도 ‘빠르게 실패하면서’ 반복하지 않으면 작은 실수와 같은 양분이 되겠지만, 명확한 실패는 원칙을 부러뜨리면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치명적으로 될 여지가 너무 많다. 명확한 실패는 경험을 일그러진 영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꾸만 샘솟는 생각 너머의 흐름에 순응하기 위해 생각을 내려놓는 과정의 반복이 투자자가 성장하는 과정이다.
어려운 파동이 많기에 그나마 쉬운 파동을, 아닌 경우가 많기에 그나마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려야 복잡함의 미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게 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고 싶은 마음이나 이것저것 먹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시장에서는 다수가 가는 길엔 꽃길이 없다. 무작정 진입해서 기대하고 싶고, 될 때까지 버티고 싶은 마음도 인지상정, 감정의 엉킴이 너무 잦기에 손실을 짧게, 막연한 기대가 너무 잦기에 red zone에서는 빨리 벗어나려는 노력 즉 멈추는 법이 습관처럼 익숙해지기 전에는 버틸 재간이 없다. 무슨 일이든 멈추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스케이트에서는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잡으면서 멈추는 기술을, 수영에서도 지칠 때 가만히 떠 있을 수 있는 기술을 익숙해질 때까지 먼저 연습해야 한다. 멈추는 데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논할 수 없다. 사람의 에너지도 수렴과 발산을 연속이므로 멈춘다는 건 반복의 전제가 된다
기계는 기대치가 없어서 기계적이지만, 대개의 투자자는 기계치여서 기대치가 너무 높다. 인간 본성 자체가 시장이란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기에 투자자는 시장 메커니즘의 작동 원리를 배워서 익히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하고, 자기 본성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기대치를 낮추어가야 한다. 기대치를 낮추면서 시장 메커니즘의 작은 톱니바퀴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쓸모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자산 시장에서 주식의 쓸모는 부의 증식 수단이기보다는 인간 성찰의 도구임을 다수는 모른다. 소수는 이러한 쓸모로서의 본질을 꿰뚫고 스스로 쓸모를 증명해 간다. 시장에서의 쓸모란 어떤 일정한 틀의 반복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고, 실천으로 스스로 증명하면 이야기가 되고, 공감을 얻게 되면서 쓸모는 쓸모를 더하게 된다. 더해지는 쓸모만큼 시장은 베풀어주고 자본주의가 그렇듯 쓸모의 대가가 수익이다. 죽을 때까지 몇 번밖에 하지 않았을 자기반성을 숱하게 하면서, 자신의 쓸모없음을 자책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가면서 스스로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곳이 시장이다.
투자하게 되면 스스로와 잘 지내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된다. 스스로와 공감하면서, 스스로 정한 원칙을 잘 지키면서 잘 지내고 싶지만, (투자자 누구나 쉽게 말하진 못하지만) 매매가 거듭될수록 투자가 버겁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자가 버거운 건 자신을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복잡하기만 한 확률의 세계에서 글로 표현하기도 힘든 복잡한 감정들로 잔뜩 엉켜있으니. 매번 도망치듯이 생각으로 매매를 거듭하고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고 외면할수록 인생의 숙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크기를 더해갈 뿐이다. 정면으로 파고들어야 하지만, (그래야 함을 머리로는 명확하게 인식하지만) 막상 시장과 마주하면 매번 다음을 기약하고 만다. 자신을 ‘다음에는 달라’ 합리화하면서 자주 거듭되다 보니 어김에 대한 질책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고 만다. 그런 식으로 대부분이 시장에서 나이를 먹어감에도 성장하지 못한다. 대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휩싸여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시장이 열리면 기계처럼 어제의 습관을 반복하면서 좀처럼 기계적이 되지 못한다. 생각이 방향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또 다른 나’는 한쪽 구석에서 무릎에 양손을 궤고 머리를 숙여버린다. 인생은 자주 바뀌는 법이니 미래에 의지해서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속도는 더해갈 뿐이다. 머물기는 쉬워도 변하기는 어렵고도 어렵다.
투자에서 집착이란 이미 이격이 발생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점쯤에서야 ‘내가 진입할 자리였는데’라고 아쉬움과 후회를 잔뜩 담아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걸 아쉬워서 후회하고, 미련을 두니 더 갈 것 같아 추격하고, 따라가서 가 주면 원칙이 부러지고, 가 주지 않으면 감정을 엉켜버리게 만드는 게 집착이다. 파동은 그저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지나간 파동은 보내고, 다가오는 파동을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 덤덤하게 올라타는 게 진정한 투자자의 태도지만. 집착은 인간이 쉽게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다. 현상을 생각의 틀에서 해석하려는 숱한 시도들은 욕심이고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 거기에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 게 성숙한 투자자의 태도지만, 집착을 부추기는 욕심은 인간이 쉽게 다룰 수 없는 감정이다. 원칙을 지켜가는 과정 그 어디쯤에서 보물을 캘 수 있으며, 확률의 세계에서 실체는 항상 비관과 희망 그 중간쯤에 있을 것이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중간쯤에 만족해야 나아갈 수 있기에 결국 투자자의 합리는 챙김과 같은 방향이다.
카지노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 매매가 잦아질수록 아무리 운수 좋은 날도 기껏 본전에 수렴했던 경험들.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의 반복조차도 확률이기에 이익이 나더라도 거듭하면 본전에 수렴할 확률이 높은 게 이치다. 하물며 생각으로 매매 횟수가 늘어난다면 그 결과는 뻔한 불구경이지 않겠는가? 설령 이익이 나더라도 이익을 더하고 싶은 욕심이 클수록 실력에 수렴할 뿐이다. 생각으로 매매하는 실력의 깊이야 뻔하기에, 매매 횟수는 성급함과 욕심의 증거일 뿐이기에 대개 횟수와 수익은 반비례하는 법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동물적 본질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투자는 어려운 것이다. 시장에 발을 디디고 머물수록 어마어마하고 무서운 자신을 만나게 된다. 아무리 다짐해도 원칙을 부러뜨리고야 마는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자신을 만나게 된다. 원칙은 복잡하면 부러지기 마련,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이 공부다.
‘너는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지만,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기만 하면 매번 제일 앞에서 으르릉거리지. 그런 너에게 매번 실망하고 질책하지만, 그런 너를 외면하지 못하는 나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무심한 세월’ ‘퍼덕퍼덕 살아있는 감정들이 아우성치는데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뇌동과 추격을 거듭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원칙 따위는 눈에 담지 않게 되고 (온 마음은 가격의 움직임에 혼연일체가 되어 그 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매번 똑같은 비극의 결말쯤 정신을 차리는, 원칙을 세우고 부러뜨리는 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