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한다고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라고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그 많은 우회로와 막다른 길과 무너뜨린 과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중략) ‘길’이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으며, 그 여정은 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임을 안다.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아도 목적지에 도달해 돌아보면, 그 방황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빠른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주장했지만, 시장에서의 진정한 힘은 ‘행하며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나온다.
행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길들인 시간의 부피만큼 인간은 자신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 정서적 욕망과 냉혹한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내면에서 정제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앎이 자만이나 과시의 도구가 아닌, 내면의 절실함과 결합해 ‘행함’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비로소 살아가는 힘이 된다. 앎은 외면을 장식하는 지식이지만, 행함은 내면을 채우는 지혜다. 내가 옳다고 믿는 원칙을 단 한 번이라도 정직하게 행했다면,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방황은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방황의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단단하게 길들이는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며,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고, 또 가고, 또다시 가라…, 삶도 쉽게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면 삶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꽃도 사람도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듯, 투자의 원칙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마주해야 비로소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 원칙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선물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직 반복하는 두께만큼 강해진다.
믿음이 약하면 그 믿음대로 선택하지도, 그 결과에 책임지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반거충이가 되고 만다. 무엇을 믿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삶의 진실과 투자의 비결은 거창한 구호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반복할 때, 투자의 속살은 우리에게 그 비밀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결과부터 탐하면 믿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 없는 원칙은 짐이 되지만, 시간을 쏟아 사랑하게 된 원칙은 방패가 된다.
지식은 아는 체하며 감정을 부추기지만, 지혜는 고요히 감정을 잠재운다.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수록 지혜의 영역에 들어선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 불쑥불쑥 끼어들어 나를 흔드는 그 마음을 달래고 다스릴 줄 아는 자가 현자다. 누구나 지식을 앞세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면 결국 ‘누구나의 평범한 삶’에 머물게 된다.
누구나 화려한 기법으로 쉽게 벌고 싶고, 당장 치밀어 오르는 감정대로 매매하고 싶다. 화산의 용암처럼 거세게 솟구쳐 나오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끝내 원칙을 부여잡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꾸준히 쌓아가는 이유는 꽁꽁 얼어붙은 우리 안의 본성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끊임없는 성찰로 본성의 바위에 균열을 내어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깨뜨려야 한다. 그것이 깨어지고 녹아내릴 때, 인생은 막힘없는 강이 되고 삶은 성숙이라는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흐르게 된다.
정직한 균열만이 원칙의 싹을 틔운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은 대단한 비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똑똑 떨어지는 낙수처럼 지루한 원칙의 반복으로 내 안의 본성을 깨뜨리는 자에게만 열린다. 두드려라. 당신이 깨져야 비로소 원칙이 산다.
투자자가 진퇴의 갈림길에서 초조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는 증거요, 설렘을 느낀다면 비로소 충분히 배웠다는 신호다. 초조와 설렘의 사이는 성급함과 기다림의 거리와도 같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꿈을 꾸지만, 누군가는 파동에 쫓기며 초조해하고 누군가는 그 파동의 리듬에 설렌다. 시장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그 심리의 엇갈림에서 나온다.
문제의 본질은 한두 번의 손익에 있지 않다. 확률은 반복의 길 위에 세워지는데, 초조한 마음으로는 결코 그 길을 끝까지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도 투자도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초조하면 시간은 형벌처럼 길게 느껴지고 설레면 그 시간은 개의치 않을 만큼 짧아진다. 초조할수록 인간은 운명에 저항하며 고통을 자초한다. 우리가 다스려야 할 마음은 성급함의 끝에서 결국 ‘기도’로 귀결되는 그 간절함이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지속가능성이 일상이 되는 진정한 삶의 꽃길이 나타난다.
파동의 고개를 넘고 넘을수록, 그 시간은 소중한 습관이 되어 계절이 바뀌듯 변해가는 시장에 순응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한다. 그 만남이면 충분하다. 투자란 결국 감정을 누르고 기다리는 힘, 그리고 솟구치는 감정을 다잡으며 멈춰 서는 절제의 합이다.
설렘은 원칙의 결과에 순응하려는 겸손에서 나온다. 기다림과 대응, 이 인간 본성에 관한 치열한 이야기가 투자의 시작이자 전부다.
“인생이 고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맞는 화살은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두 번째 화살이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쏘기 시작하며, 이 두 번째 화살이 첫 번째 화살의 고통을 몇 배나 증폭시킨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는 지름길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처럼, 인생은 때로 배가 열리길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에게 사과를 불쑥 내밀곤 한다. 삶과 투자에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마음속에서 상상한 기대치와 현실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결국 우리를 상처 입히는 것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비관하는 우리의 ‘해석’이다.
투자의 여정은 성급하게 매수하거나 운명적으로 잘못 매도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한다. 이 파동을 다루는 기술이 바로 투자하는 마음이다. 특히 투자자를 손실 회피 편향을 극복하려면, 지금 손절하는 고통보다 원칙을 어겨 나중에 마주할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손실을 움켜쥐려는 미련을 내려놓기만 하면, 삶이 알아서 할 것이다. 좋고 나쁨의 분별 없이 그저 원칙을 지키면 나머지는 운명이 알아서 할 것이다.
투자의 승부는 ‘베팅의 기술’에서 결정된다. 원칙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할 때 베팅은 정교해지며, 그 일관된 태도가 임계점을 넘을 때 운명은 비로소 수익이라는 보답을 보낸다.
귀 기울여 경청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은 투자의 세계에서도 유효한 진리다. 지혜는 겸손하게 듣는 데서 비롯되고, 후회는 서둘러 말하고자 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된다. 투자에서의 성공 또한 시장이 보여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따르는 데서 시작되며, 실패는 내 안의 감정을 시장보다 앞세우는 데서 시작된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싶고,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고, 원칙보다 감정에 끌리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이지만, 대중이 가지 않는 불편한 길을 택할 때 성공의 꽃길이 열린다.
지혜가 경청에서 오듯, 투자는 자신을 현상에 내맡기는 순응에서 온다. 또한, 절제는 우리 생의 시간이 유한하듯 쓸 수 있는 에너지와 행운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장애물은 나를 비난하는 타인이나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자유의 바다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흐름에 휘둘릴 이유는 전혀 없다. 내 탓이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장애물은 나를 멈춰 세우는 벽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높이 나아가기 위한 다리의 재료가 된다.
자기 안의 장애물을 깎아내는 일이 항상 먼저여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생의 숙명이지만, 그 흔들림을 다스리는 깊이만큼 생의 가치는 더해진다. 나를 이기는 자가 세상을 얻는다.
공자가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는 그림을 그리기 전 먼저 흰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으로, 내면의 기초가 외적 성취의 진정한 기반임을 일깨워 준다. 투자의 지속성 또한 화려한 기법이 아닌, 잘 갖춰진 기본에서 담보된다. 확률을 다루는 이 세계에서 성공의 바탕은 심리의 단단함이다. 단단하기에 지속할 수 있는 마음, 그 흰 바탕 위에서 투자의 성패는 결정된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단단하지 못한 욕심과 영글지 못한 성급함이다. 맞추려 애쓰지 마라. 투자의 현인들이 증명했듯, 열 번 중 여섯 번이면 충분히 목적지에 닿는다. 더 많이 맞추려는 욕심보다 중요한 것은 '틀린 네 번'을 대하는 태도다. 틀렸을 때의 덤덤한 태도가 다음 매매의 반복을 결정하고, 그 반복이야말로 확률 게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시장과 확률, 그리고 투자하는 마음이라는 삼각관계가 투자의 요체임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수는 성급함에 눌려 이 진리를 깨우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생각하는 마음(분석)'에 갇혀 '투자하는 마음(수용)'을 잃어버린다. 때로 서툴고 망망대해에 갇힌 듯 막막한 순간은 여전히 찾아오지만, 이제는 안다. 이러한 시간이 나를 더욱 나답게 빚어낼 것임을. 그 앎이 있기에 조금 덜 서두르게 되고, 어두운 터널에서 더 빨리 빛을 찾아 나선다.
현상을 받아들이는 심리가 바탕이다. 지금의 시련은 당신이라는 고유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가장 깨끗한 바탕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중략)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오는 자유는 무한한 비상이다. 자유는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투자자 역시 지난 손실에 연연해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집착은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익숙한 감정과 이별하고 손실을 담담히 내려놓는 것, 그것이 투자의 정수다. 인간에게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늘 고통스럽기에 현명한 투자자의 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시장의 확률은 파고들수록 혼란을 더하지만, 원칙을 믿는 심리로 그 확률을 반복할수록 혼란은 가라앉는다. 확률에는 완벽한 답이 없으며, 오직 반복을 통해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노력은 지식이 몸의 감각으로 녹아드는 ‘체화’의 과정에 있다.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지식에는 부가 머물지 않는다. 어설픈 지식에 기댄 기대는 오히려 ‘지식의 저주’가 되어 시장에서 헤매게 할 뿐이다. 자본주의의 부는 많이 아는 순서가 아니라, 아는 것을 감정 너머에서 제대로 ‘행하는’ 순서로 결정된다. 진입 전과 후, 앎과 행함 사이의 지독한 부조화를 극복한 소수만이 그 지혜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을 깊이 통찰하지 않고서는 돈의 흐름을 꿰뚫어 볼 방법은 없다.
계좌는 선택하고 통찰한 결과물의 기록이다. 시장의 부는 본능의 저항을 뚫고 지혜를 실행에 옮긴 그 ‘깊이’에만 정직하게 반응할 것이다. 실행이 곧 지혜의 완성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중략) 내려놓을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높게 날고, 높이 날수록 더 많이 본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다수는 기대를 품으며 시장이라는 가지에 의지하지만, 소수는 오직 현상에 순응할 수 있는 자신의 실력을 믿는다. 현상에 순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고집과 기대를 내려놓는 마음이다. 행동경제학이 증명하듯 손실 회피 편향과 매몰 비용의 오류, 본전 효과라는 감정의 늪은 수많은 계좌에 복구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개인투자자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강력한 특권은 ‘이익은 길게, 손실은 짧게’ 자를 수 있는 유연함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특권을 감정의 늪에 방치한 채 평범한 실패를 반복한다.
이 늪에서 특권을 건져 올려 또박또박 자신의 길을 가는 자만이 소수가 된다. 다수의 나쁜 습관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며 나쁜 가속도를 붙이겠지만, 본성을 거스르는 소수의 좋은 습관은 시간이 갈수록 선순환의 가속도를 만들어 낸다. 새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날개에 있듯, 투자자가 감정에서 벗어나면 시장의 그 어떤 자리도 두렵지 않은 ‘비상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익숙함은 나태한 관성을 자극하고, 사람의 일은 거듭할수록 그 익숙함에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투자자는 그 익숙한 본능의 관성과 매일 전쟁을 치르는 자다.
더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낼 때 삶은 가벼워지면서 깊어진다. 확률의 세계에서 단순함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으며, 그 누구도 다 잘할 수는 없다. 대상이 확률이기에 덜어내야만 본질이 보이고, 단순해져야만 절망의 계곡에서 가볍게 떠오를 수 있다. 복잡함은 명쾌함이 아니라 물음표만을 더할 뿐이다. 무작위를 전제한 시장의 파동에서 물음표가 연속되는 것은 투자자의 필연이다. 그러니 그 물음표에 억지로 마침표를 찍거나 쉼표를 찍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무작위 자체가 본래 물음표이기 때문이다. 확신이 없는 물음표의 자리라면 그저 하지 않고 건너뛰면 된다.
우리에게는 ‘하지 않을 특권’이 무한히 주어져 있으며, 그 특권을 행사할 줄 아는 자만이 무한한 기회를 손에 쥔다. 물음표에 집착하지 않고 먼저 유연해져야 파동이 변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가 재구성되고 미래의 경로가 결정된다. 투자자가 지금을 온전히 산다는 것은 현재의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순응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금'들이 층층이 쌓여 임계점에 도달할 때, 투자는 더딘 성장을 뚫고 가파른 우상향의 질적 변화를 시작한다.
성장은 경험이 축적된 결과다. 성공은 그 임계점의 문턱까지 버텨낸 소수의 몫이며, 그 기다림이 길었기에 돌아오는 과실은 더욱 풍성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