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터무니없는 확신에 자주 의지한다.

by 황금지기


좋지 못한 습관들은 몸이 너무나 쉽게 기억하기에, 삶은 필연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명제 위에 놓인다. 인간은 본래 편협하고 협소하며 불완전한 존재로, 논리보다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의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태생적으로 희망을 먹고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기에, 우리의 삶은 그 희망을 극복해 나가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나약해서, 시장의 사소한 파동과 감정의 기복에도 너무나 쉽게 뿌리째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투자의 아름다운 역설이 숨어 있다. 이 지독한 나약함을 인지하고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기에, 삶에서 진정한 보람과 결실을 캘 수 있는 것이다. 완성된 존재에게는 성장의 기쁨이 없으나, 결핍된 우리에게는 거듭남의 기회가 열려 있다.


나약함을 인정할 때, 강인함이 싹튼다. 인간은 본래 나약하다. 나약함을 혐오할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원칙을 세우고 사유를 더하는 과정 자체가 투자자의 위대한 여정이다.




막연한 기대에 선수를 빼앗긴 채 ‘어찌 되겠지’라고 방관하는 그 태만, 그리고 다음에는 다를 것이라 믿는 부질없는 희망이 결국 감정을 엉키게 한다. 이러한 방심은 결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으며, 한 번 허용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시장에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 원칙대로 행동했다’라는 명확한 사실뿐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 위대한 느림과 반복의 진리를 깨달아 간다. ‘기다림 = 느림 = 반복 = 누적 수익 = 자신감 = 반복의 축제’. 이것이 투자자가 도달해야 할 절대적인 선순환 구조다. 추세는 한 번 형성되면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붙였다가 떨구는 숱한 박스가 만들어지는 것이 파동의 구조다. 파동이 등락을 거듭하며 변화한다면, 대응 또한 즐거운 반복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이 축제를 즐긴다는 것은 곧 ‘챙기겠다’라는 결단이자 주저 없이 ‘자르겠다’라는 용기다.


반복은 수익을 향한 가장 화려한 춤사위다. ‘어찌 되겠지’라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원칙이라는 박자에 몸을 맡기라. 이 느림의 미학을 이해하는 자만이 뇌동매매의 조급함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축제를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의 부질없는 희망과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 어느 순간 깊은 깨달음이 와야 한다. 여유롭지 못한 자금과 조급한 심리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원칙을 전제로 자리를 기다려 주지 못하거나, 초기 손실을 단칼에 자르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여유로움을 잃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기억하라, 습관이라는 놈, 인간 본성이라는 그놈은 언제나 감정의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금 매매가 꼬여 있다면, 당장 바로잡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여겨야 한다. 내일도 똑같은 해가 뜰 테니 어설픈 내일을 기약해서는 안 된다. 기회는 오직 '지금의 행위' 속에만 존재하며, 희망과 미래는 당신의 투자 경험이 증명하듯 결코 믿어서는 안 될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일상과 행복은 온전히 지금에 있다. 희망과 원칙이 대치하는 곳곳에서, 원칙이라는 이름의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희망이라는 촘촘한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한다. 희망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영혼을 갉아먹는 무서운 벌레다. 불안정한 상태가 무뎌지기 전에 신속히 벗어나는 것, 그리고 잘못된 상황을 직시하고 똑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그것이 바로 희망의 극복이자 확률적 사고의 본질이다.


희망을 기대지 않을수록 현재가 살아난다. 희망에 기댄 매매는 소중한 시간을 갉아먹고 결국 파멸로 인도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딘 감각이 당신을 지배하기 전에 발을 빼야 한다. 목가적인 삶, 그 평온한 일상은 오직 희망을 극복한 자에게만 허락되는 선물이다.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꼭꼭 씹으면서 살아가는 비결이다. 내 안의 고정관념과 기대를 모두 내려놓고, 벌거벗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그것이 바로 희망의 극복이다. 생각과 욕심, 그리고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미궁과 헛된 희망의 강을 건너보라. 그저 흐름과 주변 환경에 온몸을 맡긴 채, 시시각각 변하는 파동을 고요히 바라보는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흔히 두려움을 피하려 눈을 감지만, 역설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사의 이치도, 시장의 흐름도 이와 같다. 무언가를 억지로 해석하거나 예측하려 애쓰지 말고, ‘생각 없이 그저 바라보는 것’이 현명한 투자자가 지니는 궁극의 지혜다.


생각이 개입하면 흐름은 왜곡된다. 해석하려 들지 말라, 그저 바라볼 수 있다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투자의 정답이 곁으로 와 있을 것이다.




박스의 크기와 상관 없이 상·하단에서 뒤쫓아 다니면 그걸로 끝이다. 그곳은 반복할수록 패배가 쌓이는 자리이며, 파동의 거친 물결에 휩쓸려 발걸음이 뒤엉키는 파동의 늪이다. 파동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눌림과 반등의 끝자락을 기다려야 한다. 추격은 따라가는 가격의 폭만큼 챙길 수 있는 수익과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갉아먹고, 결국 감정을 엉망으로 뒤섞어 놓는다. 이미 땅을 디딘 발을 떼지도 않은 채 재차 몸을 앞으로 밀어내려는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 그것이 바로 탐욕에 눈먼 추격의 실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봄을 한 번 더 본다는 것이며,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새겨진 주름만큼 소심해지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진다는 의미 같다. 그렇게 세월이 더해갈수록 매매에도 정교함이 더해져야 한다.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는 기필코 행하는 기필(期必)이 되어야 하고, 보내야 마땅한 자리에서는 미련 없이 붓을 꺾는 각필(閣筆)이 되어야 한다. 원칙을 온전히 지켜낸다는 것은, 먹어가는 나이만큼 내면이 성숙해졌음을 의미한다.


성장은 원칙 앞에서 얼마나 담담하냐에 달려 있다. '기필'해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각필'해야 할 자리에서 탐욕 부리지 않는 절제.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지나온 당신이 시장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이자 품격이다.




투자자의 95%는 부질없는 쳇바퀴를 돌고 있다. 적은 수익에 들뜨고 작은 손실에 연연해하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희망이라는 헛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다. 그러다 시장이 급락하여 쳇바퀴가 무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 그제야 크게 다치고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강이 멈추고 쳇바퀴가 다시 중심을 잡은 듯 보이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 그 부질없는 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다수 투자자의 서글픈 행태다.


아무리 애써 달려도 결코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구조라면, 이제는 그 바퀴에서 과감히 내려와야 한다. 시장의 무자비한 흔들림에 무게 중심을 잃고 추락을 거듭하기 전에, 그 좁은 틀 안에 가두고 있는 ‘희망’이라는 가짜 동력을 외면해야 한다. 구조적 한계를 무시한 채 쏟아붓는 노력은 성취가 아니라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진정한 탈출은 ‘멈춤’에서 시작된다. 스스로가 봐도 민망한 그 지루한 제자리걸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지긋지긋한 본능적 반복의 굴레를 단호히 끊어내야 한다.




시장은 우리가 겁을 먹어야 할 사자도, 무시무시한 호랑이도 아니다. 그는 다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해 유혹하는 교활한 뱀일 뿐이다. 큰돈은 가두리를 치고 박스를 만들며, 끊임없이 유혹한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붙이면서 심리를 흔들고, 떨 준 이후에는 크게 보여주었다가, 다시 박스로 회귀하거나 기준을 재설정하여 이성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욕망의 사과를 먹었기에, 파동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에 불과하다. 생각과 욕심이라는 사슬에 갇힌 채로는 결코 뱀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정해진 원칙대로 기계처럼 사고팔 수 있는 자만이 그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뱀은 당신이 욕망에 눈이 멀어 허우적댈 때 더욱 강해지며, 당신이 원칙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무심해질 때 비로소 무력해진다.


시장은 본능을 자극하는 뱀과 같다. 벌거벗은 나약함을 인정하되, 원칙이라는 옷을 단단히 입어라. 무심한 긍정이 당신을 누적 수익이란 풍요로운 동산으로 인도할 것이다.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벚꽃의 절정을 화사한 축제로 즐겼지만, 꽃잎이 거의 떨어진 뒤 마주한 나무의 속살은 예상치 못한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꽃잎에 가려져 있던 주황색 수술과 그 사이로 새파랗게 돋아나는 잎사귀의 조화. 그 초록의 풍경이 설렘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이면의 내면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도 삶의 충만한 진리를 꼭꼭 씹어 삼킬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요동치는 가격의 등락과 자극적인 정보라는 화려한 소음에만 눈이 머물러서는 본질에 닿을 수 없다. 화려한 꽃잎과 같은 시세 분출에 현혹되지 말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파동의 서늘한 이면을 정직하게 응시해야 한다. 진정한 수익의 기회는 늘 군중의 아우성이 잦아든 뒤에 고요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꽃이 지고 나서야 나무의 진모가 보인다. 새파랗게 돋아나는 기회의 잎사귀를 보라.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고독한 시선이야말로, 당신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계좌를 단단하게 만드는 열쇠다. 꽃이 진 뒤 돋아나는 잎사귀처럼, 기회는 늘 군중의 시선 밖에서 시작된다.




직관은 수천 시간의 훈련을 통해 날카롭게 다듬어지지만, 그 직관을 제어할 ‘자제력’이 없다면 결국 충동이 앞서게 된다. 뇌는 행복한 기억과 긍정적인 상태일 때 비로소 직관의 날을 세우며, 뇌의 에너지가 충만할 때만 본능을 억제하는 자제력을 발휘한다. 만약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고 에너지가 고갈되면, 즉시 “보이는 것이 세상 전부다”라는 지독한 인지적 편향에 갇히게 된다. 뇌가 착각과 주관의 함정에 빠지면 매매는 원칙을 벗어나 뇌동으로 흐른다.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동물적 본능이다. 스트레스로 에너지가 고갈되면 직관은 흐려지고, 나를 지켜주던 자제력은 증발해 버린다. 그 자리에 남을 것은 본능뿐이다. 이 상태에서는 가장 익숙하고 쉬운 방식, 즉 시장과는 엇박자인 인간 본성의 오류를 또다시 답습하게 된다. 특히 뱀(큰돈)이 쳐놓은 박스의 유혹에 걸려들면, 에너지가 바닥난 뇌는 그 덫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만다.


긍정하는 에너지가 곧 실력이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몸과 마음이 피로와 부정에 찌들어 있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직관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싶다면 먼저 일상을 긍정으로 채우고 뇌의 에너지를 유지해야 한다. 자제력은 무한한 자원이 아니라, 소모되는 연료와 같다.




첫째, 선수(先手)를 잡아 주도권을 쥐라. 챙길 것은 단호히 챙기고, 줄 것은 미련 없이 내주어야 한다. 자기 돌을 버릴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상수다. 시세가 이미 눈에 보일 정도면 보내 주어야 마땅하다. 뒤늦게 후수(後手)로 따라붙으면 선택의 여지는 사라지고, 대응의 공간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어 결국 심리가 꼬이는 빌미가 된다. 챙길 자리에서는 '진입하고, 챙기고'를, 아닌 자리에서는 '자르고, 진입하고'를 반복하며 시장과 선수를 주고받아야 한다.


둘째, 파동의 응수타진(應手打診)에 유연하게 반응하라. 바둑 격언에 '붙이면 젖히고, 젖히면 뻗으라'라고 했다. 파동은 거대한 박스의 연속이다. 시장이 갈 것처럼 유혹하며 붙여온다면, 젖혀서 주도권을 잡아라. 시장이 방향을 틀어 젖힌다면 그 흐름을 따라 같이 뻗어주어야 하며, 시장이 반대로 강하게 뻗어나간다면 즉시 손실을 짧게 끊어야 한다. 특히 앞고점과 앞저점이 쌍을 이루는 자리는 파동의 맥점이다. 이런 급소 자리에서 무모하게 따라붙는 우를 범하지 마라. 파동은 등락을 거듭하는 크고 작은 박스이자 물결이다.


매매는 시장과 벌이는 한 판의 대국과도 같다. 바둑에서 사석(死石)을 활용해 대세를 잡듯, 손절이라는 작은 돌을 내어주고 주도권을 잡아가야 한다. 큰돈의 방파제 앞에서 파동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그 맥점을 짚어내는 안목이 있다면, 더 이상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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