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중 절대 규칙을 바꾸지 않으면서 선인들의 선례 즉 절대 규칙을 찾아 익히고 따르는 과정이 영원회귀 같아야 한다. 투자자의 의무는 손실 회피 편향을 극복함으로써 손실을 최소한으로 고정하는 것이며, 각자의 반복과 복기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각자의 틀을 완성하는 것이다. 투자에서 작은 돈은 큰돈에 비해 유리할 수밖에 없으므로 실수를, 손실을 빨리 인정할수록 확률은 높아진다. 인문학적 소양이 토대가 되어야 하며 현명한 투자자는 비탈길을 올라 언덕에 서서 군중을 바라봐야 한다.
자만과 독선을 누르고 주어지는 주변 환경에 순응하면서, 솟아오르는 욕망을 시간에 맡겨 버리는 게 현명한 삶의 태도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진화하였기에 숙고 체계인 인간의 뇌 하부에 있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에서 끊임없이 발현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실수가 실수를 부르기에 실수의 여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생각이 수시로 변하는 게 인간이기에 짧은 시간 멋대로 솟구치는 욕망에 꿈쩍도 하지 않는 올바른 습관으로 오랫동안 다듬었던 관점에 따라야 후회는 적어지고 성장하게 된다. 투자자는 게임 중에는 절대 규칙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선인들의 선례 즉 절대 규칙을 찾아 익히고 따르는 과정이 영원회귀 같아야 한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다음 수가 성장으로, 배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켈리 최적화 모형. 켈리 기준은 2p – 1 = x 라는 공식으로 표현되는데, 이길 확률에 2를 곱하고, 거기서 1을 뺀 값이 바로 베팅에 걸어야 할 가진 돈의 비율이 된다. 예를 들어 이길 확률이 55%라면 최대한 많이 따기 위해서는 가진 돈의 10%를 베팅해야 한다. 만약 이길 확률이 70%라면 가진 돈의 40%를 베팅해야 하고, 이길 확률이 100%라면 가진 돈을 모두 걸라고 모형은 말한다. ‘도박꾼의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는 과소 베팅을 통해 위험을 줄여야 한다. 하프 켈리나, 부분 켈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켈리 모형이 이길 확률 55%를 반영하여 자본의 10%를 투자하라고 말할 때 단지 5%나 2%만 투자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과소 베팅은 포트폴리오 운용에 안전마진을 제공한다.
개별 주식 선택 과정에서도 안전마진을 고려했다면, 이중의 안전장치를 가진 셈이면 커다란 심리적 안정감을 줄 것이다. 과잉 베팅의 위험은 과소 베팅의 불이익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투자자는 반드시 부분 켈리 베팅만을 고려해야 한다. 베팅 규모를 줄이면 잠재 수익도 함께 줄겠지만, 켈리 모형에서 베팅과 수익의 관계는 포물선 모양을 가지므로, 과소 베팅의 불이익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베팅의 규모를 50%로 줄이는 하프 켈리의 경우 잠재적 수익률은 단지 25%만 줄어들 뿐이다. 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켈리 시스템은 자본을 복리로 투자해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불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충분한 시간과 충분한 인내심이 있다면, 바로 당신에게 적합한 방법입니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 로버트 해그스트롬>
파동은 상승과 하락, 횡보로 구성되며 각각의 확률은 33%다. 추격하지 않고 횡보 구간을 잃지 않는 구간으로 가져갈 수 있다면 66% 확률로 켈리 최적화 모형의 값 32%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lower leverage = 3을 유지해야 여유로운 매매가 가능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추격으로 횡보 구간에서 손실을 보게 되면 33% 확률 게임이 되고, 켈리 공식으로 2×0.33 – 1 = -0.33%가 된다. 즉 추격으로 손실이 발생하게 되면 게임을 거듭할수록 33% 손실 상태에 수렴하게 되므로 추격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임이 투자다. 확률의 세계에서 추격은 자신에게 행하는 범죄와도 같다. 물론 leverage가 크면 수익이 늘어날 때 가파르게 돈을 벌겠지만, 손실이 발생하면 가파르게 손실을 보게 된다. 투자자의 의무는 손실 회피 편향을 극복함으로써 손실은 최소한으로 고정하고, 이익은 길게 가져갈 수 있는 (cut loss short, let profit run) 실력을 갖추어가는 것이다.
철학이 가진 그 어떤 진리도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개별적이며, 그것을 추구해 온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온전히 그대로 이전될 수 없다. 누가 처음 말했든 철학의 교의가 우리 것이 되려면 우리의 경험, 믿음, 해석이라는 인지적 여과를 거쳐야 한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마치 철학처럼 투자 기법도 가르칠 수는 있으되 전할 수는 없다. 각자의 반복과 복기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각자의 틀로 완성될 수 있을 뿐이다. 투자자는 철학자의 자세로 내 걸로 만들려는 열정으로 충만하고, 절대 끝나지 않는 과정을 이어가야 비로소 자신만의 정답에 도달하게 되고 그는 전설이 된다. 그려지는 파동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점을 돌파하고 무너졌느냐! 고점을 낮추고 무너졌느냐!” 끊임없이 되뇌어야 한다. “저점을 붕괴하고 올라섰느냐! 저점을 높이고 올라섰느냐!” 파동을 그리면서 되뇌어야 한다.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하기 전에는 파동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습관이 되기 전에는 쉽게 망각하고, 한두 번 어기게 되면 전체가 흐려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그려지는 파동이 확률이 범주이기에 감정을 배제하면서 파동을 그려가는 습관을 만든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보상이 크기에 도전할 만하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가장 힘든 지적 고백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술과 일치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져다 자기 생각을 보강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고집스러움과 신념을 혼동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잘못된 채로 버티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곤 한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실수를 인정하고 손실을 짧게 자르지 못한 채로 시장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게 투자자로서의 인간 본성의 한계다. 위험과 실수의 여지를 줄이는 방법은,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게끔 이끄는 방법은 손실을 짧게 끊는 것이고 재차 여유롭고 덤덤하게 반복하는 마음뿐이다. 손실을 짧게 끊기 위해서는 실수를 좀 더 빨리 인정해야 한다. 실수를 빨리 인정할수록 흐름이란 고래의 등에 올라탈 확률은 높아지게 된다.
“이 세계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는 이 세상이 비합리적이지도, 그렇다고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은 거의 합리적이긴 해도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곳이다. 인생이 불합리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나 모든 곳에서 논리를 찾으려 든다면 덫에 걸려들고 마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간은 덜 수학적이고, 덜 정확하다고 보면 된다. 정확성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부정확성은 숨겨져 있다. 자연의 야성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몸집이 작아 효율성이란 강력한 무기를 지닌 개인이 게임의 일반 규칙을 지키면 몸집이 큰 시장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시장은 개인이 인간의 본성이란 선 위로 올라와 여유롭고 덤덤하게 서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오히려 여유롭다. 개인이 원칙이란 틀에서, 그것도 숱한 세월 동안 검증된 기준이란 틀에서 기계적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면 시장은 이 숨바꼭질과도 같은 게임에서 그를 잡을 방법이 없다. 투자에서 작은 돈은 큰돈에 비해 자유롭기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시장이 인정할 만큼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경험을 내공으로 다듬고, 통찰력이 감각에 닿아 누적되는 돈은 감히 욕심이라 볼 수 없다. 그는 그렇게 전설이 되고, 시장에서 자유하게 된다.
사람들은 사고 과정을 통해 의문을 해결하고 신념을 형성한다. 이후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이것은 습관이 된다. 따라서 신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신념에서 나온 행동을 보아야 한다. 퍼스는 이 명제를 ‘실용주의’라고 불렸다.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그것의 실제 결과에 대한 우리의 사유”라고 그는 설명한다. “사유의 중요한 기능은 행동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의 의미를 밝히려면 그저 그것이 어떤 습관을 만드는가를 알아내면 된다. 어떤 사물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가져오는 습관과 같다.” “우리 생각은 중재 기능을 훌륭하게 해낼 때 참이 된다.”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신념은 우리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도울 때 참이 되고 ‘현금 가치’를 갖는다. 그때 진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된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사람들이 절대성이라는 무인도에 좌초되지 않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방향을 찾아 나가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용주의에는 편견이나, 독단, 엄격한 규범이 없다. “간단히 말해, 실용주의는 신에 대한 탐색 영역을 넓힌다. 진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실용주의의 유일한 테스트는, 우리를 이끄는 데 가장 잘 작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는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우리 문화에는 변이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편향이 존재한다. 대신 우리는 중심값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현실 문제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다.” 굴드의 따끔한 지적이다.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시스템의 추세와 시스템 내부의 추세를 구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의 평균 수익률과 개별 주식의 수익률 변이(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굴드는 “모든 경우를 담고 있는 풀하우스를 어떤 하나의 수치(평균)로 추상화시키고 나서, 이 수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경로를 좇는 오래된 플라톤적 사고는 대개 오류와 혼란을 가져온다”라고 말한다. 투자자들은 “추세를 알아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방향성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시스템 내부의 변이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방향으로 잘못 읽는다. “다윈의 세계에서는 변이가 궁극의 실재이고, 계산된 평균은 추상이다.”라고 굴드는 말했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카너먼은 직관이 올바른 때가 있는데,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예측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규칙적인 환경’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오랜 시간 연습을 통해 이런 규칙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상황이 단서를 제공했다. 이 단서를 통해 전문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해놓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가 답을 주었다. 직관이 바로 인식이다. 따라서 우리 머릿속에 많은 정보를 저장해놓을수록 직관적 사고 기술이 향상될 거라고 카너먼은 믿는다. 나아가 시스템2가 시스템1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대체로 정보자원이 상태와 관련된다. 판단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 시스템2 사고는 휴리스틱(시스템1 사고에서 일어나는 어림짐작법)을 보충하거나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데 이때 시스템2 사고가 정보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보가 없는 것이다.
카너먼은 이렇게 설명한다. “지적 나태라는 죄를 모면하는 사람은 적극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더 경각심이 많고, 더 지적으로 적극적이면서, 피상적인 대답에 만족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직관을 자주 의심한다.” 적극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 간단히 말해, 시스템2 사고가 강하고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시스템1 사고와 시스템2 사고는 별개의 마음이다. 다양한 학문을 학습하고 이해하여 주요 정신모형을 충분히 갖춰 놓지 않으면, 시스템2 사고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카너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게으르다. 지금 환경을 가장 잘 기술하는 올바른 빌딩블록 조합을 찾아야 한다. 상황에 맞는 올바른 빌딩블록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국, 패턴을 인식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게으름 + 이기심 = 지적 게으름’ 투자 실패의 원인에 대해 내린 정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무작위로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이지만, 자신만이 충분히 규칙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고, 반복과 복기, 경험을 통해 충분히 훌륭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 정보 즉 지식(앎)이 머릿속에 채워지기 전에는 정보가 없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쌓여가는 지식(인문학적 소양)이 토대가 되기 전에는 그 어떤 건축물도 그 위에 지을 수 없다. 머릿속에 많은 정보를 저장해놓으면 직관적 사고는 향상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자 시간을 투자하여 배움을 확장해야만 하는 이유다.
왜! 그토록 다짐했건만 한방과 기도, 뇌동과 추격, 손실을 자르지 못하고 버틸 수밖에 없었는가? 왜! 누구나 군중은 그러한가? 로마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더 달콤한 것이 없도다. 현자들의 가르침으로 높은 곳에 잘 구축된 평온한 거처를 취하고 있는 것보다, 거기서 그대는 다른 이들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혼란에 빠져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것,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아 정신없이 방황하는 것을”
심리투자 법칙의 저자 알렉산더 엘더는 “트레이더의 목표는 매수세와 매도세 사이의 힘이 균형을 판단해 이기는 쪽에 돈을 거는 것이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군중의 머리 위에서 놀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 비탈길을 올라 언덕에 서서 군중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깨달음의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반복과 복기 그리고 오랜 경험을 통한 선인들의 선례가 단순한 원칙으로 바로 서게 되고, 원칙을 쉽고 편안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