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는 열이 나는 꿈을 꿨다. 나는 꿈속에서 열을 재어보기 위해 체온계를 찾아 입에 물었다.
작년에 샀던 전자식 체온계였다. 전자식 체온계라고는 하지만 레이저 같은 게 나온다거나 하는 멋있고 세련된 체온계는 아니다. 아주 어릴 때 보던 수은 체온계처럼 생겼는데, 다만 전자식으로 숫자가 표시되는 작은 체온계였다.
집에서 체온을 잴 때는 줄곧 입 안 체온을 재고 있다. 정확히는 혀 밑의 체온을 재는 것인데, 다른 부위의 체온보다는 평균적으로 더 높은 수치가 나온다. 하지만 그편이 미열이라도 몸에 열이 나는 것을 진단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해오고 있다.
혀 밑에 체온계에 달린 금속 부분을 갖다 대었다. 그런데 혀가 조금 움직인 탓인지 체온계의 끝부분이 입안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그대로 분해되었다. 체온계 안에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부품이 있었는데, 여러 부품이 내 입 안 구석구석 가득 차고 말았다.
작은 스프링 같은 것도 있었고, 금속으로 된 부품, 플라스틱으로 된 부품, 그 크기와 재질이 다양했다. 다행히 날카로운 부품도 없었고 입 안에 상처를 나게 할 정도는 아니어서 별로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마치 견과류나 블루베리를 입 안 가득히 넣고 우걱우걱 삼킨 것처럼 입 안 구석구석 이물감이 들었다. 잇몸 바깥쪽과 볼 사이, 앞쪽 아랫니 뒤와 혀뿌리 사이, 위쪽 어금니 뒤쪽과 목구멍 사이마다 체온계의 작은 부속들이 박혔다. 내 입안에는 굴곡지고 은밀한 장소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뱉어내고 뱉어내어도 작은 체온계 부품들은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나왔다.
입안에 느껴지는 이물감이 불편해서 난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아침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겨울도 한참 지난 요즘은 이른 새벽부터도 창밖이 환하다.
몇 시인지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얼른 시간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늦잠을 자버려 지각이라도 할까 봐 조금 불안하고 걱정됐다. 하지만 핸드폰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올려두었을 만한 침대 머리맡이나 서랍장 위에도 없었다. 충전기에 꽂아둔 것도 아니었다. 이불까지 들춰가며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우선은 입안에 남은 불편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먼저 마시기로 했다. 더듬더듬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가면서 소파와 식탁 위를 확인했지만, 거기에도 내 핸드폰은 없었다.
정수기 아래에는 물컵처럼 사용하는 텀블러가 놓여 있다. 지난번에 직장 동료에게서 선물 받은 텀블러였다. 민트색 커버가 달렸고, 안쪽은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텀블러였다. 정수기에서 500mL 버튼을 눌러서 물을 채우면 텀블러 가득히 꼭 맞게 물이 채워졌다.
정수기에는 120mL, 500mL, 1,000mL가 급수되는 버튼이 있다. 120mL를 한 번 누르면 내가 마시기에 물의 양이 모자라고, 두 번보다는 세 번을 눌러서 360mL를 받으면 적당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집에 있는 다른 컵들은 물이 넘치고 말았다.
두 번, 세 번에 나눠서 물이 채워지기를 정수기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나 세 번째로 120mL 버튼을 눌렀을 때는 컵에 물이 넘치기 전에 다시 급수를 멈추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 텀블러는 500mL 버튼을 한 번 누르면 정수기 버튼을 더 누를 필요 없이, 물이 넘치지 않을까 조심스레 살피고 순발력 있게 급수 정지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500mL의 물을 받을 수 있었다.
500mL의 물을 한 번에 마시기에는 양이 조금 많은 듯하지만 마시고 남은 물은 바로 옆 싱크대에 버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다만, 조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500mL의 물을 이 텀블러에 담았을 때 물이 넘치지는 않지만, 조금의 여유도 없이 텀블러 가득히 물이 차기 때문에 혹시라도 텀블러를 들어서 입에 가져다 댈 때까지 물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숨을 고르고, 팔의 움직임을 절제하며, 텀블러가 입에 닿기 전에 세심하게 윗입술을 살짝 내밀어 주고, 아랫입술에는 단단히 힘을 주는 등 꽤 복잡하고 세심한 근육의 움직임과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정수기 버튼을 한 번만 누르고 물이 다 채워질 때까지 신경을 안 쓸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꼭 500mL의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어제 읽은 소설에서 여름날 목화 창고로 향하는 말라붙은 길 위에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은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내 상상일 것이다. 그래도 만일 그 길 위에 물을 쏟아버린다면 지금처럼 물은 땅으로 흡수되고 공중으로 기화되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사실은 500mL가 아니고 그에 가까운 양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저울을 가지고 재본 적이 있었는데 500g에서 더했는지 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수치가 정확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실의 실험 기구로 측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수기 물의 부피나 질량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부엌의 저울은 커피를 내려 마실 때 사용한다. 종종 재미 삼아 이런저런 물건의 무게를 잴 때도 사용한다. 하지만 주로는 커피를 내려 마실 때 원두와 물의 양을 재느라 사용한다.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기 시작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엔 오히려 커피를 내리는 과정 자체에서 안정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 좋은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커피의 맛과 향에 신경을 쓴다. 커피의 맛과 향이 잘 느껴지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맛과 향 외에도 안도감 같은 것을 주기 때문이다. 열이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체온계로 체온을 재는 것처럼 커피는 나의 미각과 후각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 된 것 같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얼른 시간을 확인하고 싶어서 곧바로 핸드폰을 찾았다. 여전히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방에는 서랍장 위에 시계가 놓여 있지만, 지난밤 벗어둔 옷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가리고 있는 옷가지를 슬쩍 밀치기만 해도 시계는 서랍장 모서리 끝 위에서 시간을 표시해 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을 찾았다. 그것은 침대에 누워서도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다만 방안이 너무 환한 나머지 하얀색의 핸드폰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핸드폰의 검은 액정 화면이 위쪽으로 놓였었다면 금방 찾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1시 35분. 새벽의 어스름이 밝아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캄캄한 한밤중이었다.
날이 밝은 줄로만 알았던 것은 화장실 전등의 불빛 때문이었다. 지난밤의 나는 잠들기 전에 화장실의 전등을 꺼두지 않았나 보다. 평소 화장실 전등이 이렇게 밝았나 싶었다. 그 불빛은 유난히 희고 밝아서 창밖에 날이 밝아온 것처럼 느껴지게 할 만했다.
체온을 재고 싶었다. 입안의 이물감은 여전한 것 같았다. 물을 마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물을 마셨었는지 잠시 생각했다. 물을 좀 더 마셔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방안은 아직 환했다.
화장실 전등의 스위치를 껐다. 본래의 시간을 되찾은 방안은 아까와는 정반대로 칠흑처럼 어둡다. 다른 밤보다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서랍장 위에 있는 시계는 안 보인다. 원대로라면 파랗고 은은한 불빛으로 시간을 표시했어야 했다. 이제 시간은 1시 36분이다. 이제부터 잠들어도 다음날 출근하기에 수면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열을 재어보기 위해 체온계를 찾아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