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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Jul 24. 2024

25년 된 일회용 카메라를 현상하다

한여름에 되돌아보는 빛바랜 겨울의 색감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무렵의 어느 늦여름, 나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하나 샀다. 당시 나는 사진과는 전혀 접점이 없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적은 용돈을 받던 아이였는데, 그런 내가 무슨 연유로, 또 무슨 돈으로 그 카메라를 샀는지는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그 카메라를 산 것은 오롯이 나의 결정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친구들이고 어른들이고 할 것 없이 내가 그걸 샀다는 것이 적잖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때는 2002년에서 2003년,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피처폰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가 촬영기능이 있는 휴대전화를 처음으로 가지게 된 것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으니, 내 평생 셔터란 것을 직접 눌러본 것은 높은 확률로 그 일회용 카메라가 최초였을 것이다.


나는 그 카메라를 들고 내 최초의 피사체로 일상의 온갖 모습을 선택했다. 영어 학원 가는 길의 시장 골목, 학교 정원에 핀 무궁화, 그곳에 서서 돌아보던 반 친구, 거실에서 이모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의 모습. 그 외에도 휠이 돌아갈 때까지 모두 찍어서 현상까지 했는데, 슬프게도 현상한 사진은 어디로 갔는지 더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잃어버린 필름처럼 내 기억도 희미해져, 20년 전의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남겼는지 더는 확신할 수 없다.


그 후 나는 나름대로 사진에 관심이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필름 카메라에는 별다른 흥미가 일지 않았다. 카메라의 성능을 기준으로 새 핸드폰 기종을 고르고, 친오빠한테서 받은 낡은 캐논 카메라를 들고 출사라도 나가는 날이면 다른 사람들이 들고 있는 최신식 DSLR 모델들의 고성능을 부러워할 뿐이었다. 나도 빨리 가난한 학생 신분에서 탈피해서 비싸고 좋은 카메라를 사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 2022년 5월, 마침내 그 가난한 학생 신분을 탈피할 때가 찾아왔다. 나는 라이프치히에서의 학생 생활을 정리하고 함부르크로 일을 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이미 서명했고, 기숙사 퇴실 신청과 함부르크에서 살게 될 방의 입주계약도 모두 완료해둔 상태였다. 학교는 당연히 더 이상 나갈 필요가 없었고 주말이면 알바를 나가던 라이브 하우스의 사람들에게도 미리 작별 인사를 해두었다. 최종적으로 기숙사 열쇠를 반납해야 하는 6월 말까지는 두 달 가량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서 모든 짐을 다 싸고, 부치고, 그걸 또 혼자서 받아서 풀고, 입주 청소를 하고, 필요한 가구를 새로 사서 조립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주 오랜간만에 처음으로 여유로운 기분이었다. 맹위를 떨치던 팬데믹도 조금은 누그러져 그간 발이 묶였던 세계도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짧게라도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독일에 살면서 육로로 갈 수 있는 어지간한 근교 나라는 다 가보았으니, 여태껏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휴양지 스타일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이 포르투갈이었다.


새파란 바다와 새하얀 햇살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찍을 것에 한껏 들떠있던 나는, 출사를 준비하며 우습게도 고성능 고스펙 카메라가 아닌 유통기한 지난 일회용 카메라를 주문했다. 별 생각 없이 이베이에서 카메라 제품들을 둘러보다가 유통기한이 2002년 4월에 만료되어버린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던 것이다.

제품명은 후지필름 퀵스냅. Made in EU, 제조된 지역은 독일의 클레베(Kleve)라는 곳에서.

구매한 시점에서 이미 유통기한을 20년하고 1개월 넘겨버린 카메라. 구글에 대강 검색해본 바로는 제조일자로부터 3년에서 5년 정도가 유통기한이라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해당 카메라는 1997년에서 1999년 사이에 제조되었다는 말이 된다. 미개봉 상품이었지만 판매자 또한 작동할지 어떨지 확인할 수 없다는 문구를 명시해둔 상태였다.


나 역시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배송비 포함 12유로 정도로 딱히 비싸지 않았으나, 그래도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25년 된 필름에 아직도 뭔가가 찍혀나올 것인가. 찍혀나온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가.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까지는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다시 흘러야 했다. 포르투갈로 떠나기 이틀 전, 나는 목과 코에 그때까지 겪어본 적 없던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 진단을 받고 말았다. 그에 따라 포르투갈 여행은 물론 전면 취소해야만 했다. 2020년과 2021년도 무사히 넘겼고 접종도 제때 받았는데 왜 하필 지금 걸리냐는 생각에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번 제동이 걸리고 나니 그 카메라를 선뜻 사용하기가 망설여졌다. 뭔가 특별한 걸 찍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 특별한 게 뭔지 알 수 없었고 컷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신경쓰였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보니 어느새 일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이제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그 특별한 순간이란 건 기다린다고만 해서 다가와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연식이 몇 년 차이 나지도 않는 오래된 카메라를 겨울 코트 주머니에 넣어 데리고 다니며 그때그때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눈 덮인 덤불, 투명하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 앙상한 나무들, 희미한 알전구,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반려묘 등, 오며가며 마주하는 사소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마치 초등학생 때의 내가 그러했듯이.


그렇게 카메라의 휠이 다 돌아가고 현상을 맡기기까지는 다시 반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점의 나는 더이상 결과물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로부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 필름에 발라진 감광제가 모두 휘발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냥 이런 것도 시도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라고 생각하고 그저 시커먼 결과물을 마주하더라도 그냥 웃어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상 스캔본을 메일로 받아본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제법 선명한 상(像)들이.

제일 처음으로 찍은 사진은 나의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로즈. 땡그란 두 눈이 사랑스럽다. 내가 연사가 불가능한 사진을 찍는 건 어떻게 알고 저렇게 얌전하게 포즈를 취해줬는지.
두번째 사진도 로즈. 이때가 분명 한낮이었는데 해질녘 같은 색감이 나왔다. 빛바랜 색감과 대조되는 햇빛의 명암이 선명하다. 사진의 제목을 짓는다면, '피아노가 치고 싶은 고양이'.
회사 바로 맞은편 건물들과 나무들. 여기 살면 출퇴근 오 분 컷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다니는 곳인데, 이렇게 보니 또 전혀 색달라 보인다. 사진의 색감이 푸르고 따스하다.
오후 세 시 사십오 분과 네 시 사십오 분의 함부르크, 시리게 맑고 차가웠던 늦겨울의 오후. 한겨울이었다면 이 시간에 이미 새까맣게 어둠이 내렸을 것이다.
지난 겨울에는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눈 쌓인 벌판과 나무들은 언제나 아름다워서 봐도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 때도 아직 오후 네 시가 안 됐을 시각인데 해질녘 색감이 물씬하다.
커버 이미지로 사용한 사진. 도대체 어디서 찍었는지는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으나, 어둠 속에 유일하게 떠올라 있는 불빛에 무언가 상징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만은 분명하다.
현상하기 전까지는 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보니 이렇게 같은 장면을 두고 구도를 고민한 사진들도 몇 장 보인다. 고민이 무색하게 둘 다 비뚜름하게 찍히고 말았지만.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를 두고 구도를 고민한 흔적. 이제는 살지 않는 예전 집의 베란다에서 찍은 풍경이다. 이 집이나 동네는 전혀 그립지 않지만 남향 베란다는 좀 그립다.
푸르른 하늘의 고요함이여. 여윈 나무의 강인함이여.

전제적으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해질녘의 색감과 겨울의 깨끗한 쓸쓸함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표현되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더 자주 이렇게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물론 모든 사진이 다 잘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정중앙에 내 손가락이 떡하니 찍히거나 노이즈가 너무 심해 무엇을 찍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사진들도 몇 장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빛바랜 색깔이, 오래된 감성이. 감광제는 분명 어느 정도 휘발하였을 것이고, 필름도 부식되었을 것이다. 낡은 카메라의 내부는 분명 온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과 손상만큼의 오묘함이 어우러져 전성기 때의 카메라도 표현하지 못했을 이미지가 맺혔다. 그것이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흘러 조금씩 부서져내리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오히려 더 멋질 수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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