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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시리어스 맨 (2009)

정답은 없을지 몰라도 원인은 있고, 그 흐름의 시그널은 분명히 존재한다.

by 육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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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ousman.jpg 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 , 2009


영화의 시작 부분에 영화 메인 줄거리와 관계없는 일화가 먼저 나온다.


남자가 눈 오는 날 어려움을 당했고, 그때 도움을 받았고, 그 사람이 심지어 아내가 알고 있는 랍비여서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에 집에 초대까지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사색이 되어 신이 우리를 저주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장례까지 치렀다는 사실까지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남편은 당황한다. 그럼 내가 만난 사람은 뭐지? 악령(디벅)인가? 그 혼란의 와중에 초대받은 손님이 집을 방문한다.


일단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어준다. 수프를 권하고 됐다고 말하는 랍비.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고, 악령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고 랍비는 웃고 넘긴다. 아내는 수염 자국 등을 봐서 악령이 맞는다고 말하고, 칼?과 같은 도구를 랍비(악령)의 가슴에 꽂아 넣는다.


랍비는 누가 악령인 거 같냐고 말한다. 가슴에 칼을 맞은 사람이겠냐, 멀쩡한 사람의 가슴에 칼을 꽂는 사람이겠냐는 의미이겠지.


하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랍비는 악령이 맞았을 것이다.

아내가 말한 디테일한 증거들과 증언들, 수염 자국으로 유추 가능한 사실. 심지어 칼을 맞고도 껄껄 웃으며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며 어물쩍,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것까지.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라 악령 그 자체에 더 가까워 보인다. 모든 증거들이.



남편은 앞선 사실들을 몰랐고, 눈앞에서 아내가 말하고 보여주는 증거들에도 그저 당황하다가 해당 일화는 끝이 난다. 이 남편의 모습이 바로 주인공 래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후 래리 가족들의 모습이 하나씩 나오는데, 래리가 대학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하필 슈뢰딩거의 고양이일까? 영화의 처음에 나왔던 일화가 '그 사람은 랍비였을까 악령이었을까'가 중심 내용임을 생각할 때,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연관이 있고 의식적으로 언급한 부분 같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자세히는 몰랐기에 이번에 대강 찾아봤고... 이런 내용이 눈에 띄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였는데 슈뢰딩거와는 조금 다른 측면으로 "관측을 해야만 비로소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라는 양자역학의 개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며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맥락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언급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일은 벌어질 수도 있고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여러 상황을 통해 유추와 추정이 가능하다. 원인은 거기에 있었고 시간이 지나며 결과를 향해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결과만을 보고 그제야 당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주인공 래리는 어리석게도 이런저런 꼬이는 일들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랍비들을 방문하지만 별다른 시원한 답은 주지 않는다. 인생의 골치 아픈 사건들 앞에서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일에는 원인과, 결과를 향해 온 과정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정말 예외적으로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원인과 과정이랄 게 없는 재앙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일들에 원인과 과정이 존재한다는 말이,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불행은 아예 없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며 사족을 붙인다.)






주인공 래리가 맞닥뜨린 상황들에도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내의 감정을 헤아릴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아내의 외도 고백과 이혼 요구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충격 사건이었겠지. 래리는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속은 느낌이겠지만 그냥 본인이 몰랐던 거고, 몰랐던 이유는 여러 시그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그러고 있는 모습까지도 영화 전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래리는 이웃집 남자가 불편하고 왠지 거슬리지만, 사실 그 남자는 래리가 집까지 찾아온 학부모에게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받고 있을 때 "이 남자가 당신을 괴롭히냐?"라며 도움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래리는 평소 싫어하던 사람의 말이니 그냥 무시한다. 그 모습을 통해서 관객들은 래리가 싫어하는 그 이웃이 사실은 래리가 곤란한 듯 보이자 곧바로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걸 관객은 알 수 있다(래리는 모른다).



아내와 바람이 난 사이(싸이)라는 남자. 영화 제목이 시리어스 맨인데 이 영화 내에서 '시리어스 맨'이라는 수식을 가장 많이 듣는 건 주인공이 아니라 사이(싸이)이다. 그는 진지하고 젠틀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진지하고 젠틀한 사람이 애초에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자신을 기만했을 리가 없을 텐데도, 래리는 사이(싸이)의 눈앞에서의 젠틀한, 계속 친구처럼 구는 태도를 그의 진심이라고 믿는다.



래리는 테뉴어(종신 재직권) 심사를 앞두고 있는데 그 와중에 위원들에게 래리를 비난하는 편지가 계속 도착하는 일까지 생긴다. 래리는 자신에게 와서 뇌물과 함께 학점 변경을 요구한 학생을 의심하며 편지의 영어가 좀 특이하지 않더냐고 하지만, 이조차도 잘못 짐작했음이("영어는 완벽해") 드러난다. 그럼 대체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래리.



그리고 그 편지는 '시리어스 맨'인 사이(싸이)가 보냈음을 나중에 나오는 단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이(싸이)가 갑자기 죽고, 아들의 성인식에서 아내는 래리에게 화해의 말을 건네는데 그때 아내가 말한다. "사이(싸이)가 당신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당신 테뉴어를 위해서 추천서도 썼다"라고.

그리고 동시에, 래리의 테뉴어 자격을 비난하는 편지는 사이(싸이)가 죽은 뒤로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그 범인이 사이(싸이)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래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짜 어떻게 할 것인가? 뭘 어쩌겠어? 몰랐고 잘못 파악한 나 자신을 한심스러워하며, 견디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거나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겠지.





영화가 결말을 향해 간다. 래리는 엄청난 변호사 비용 청구서 앞에 한숨을 쉰다. 사실 변호사는 해당 변호사의 비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말했었지만 래리는 귀담아듣지 않았던 거 같다. 그 금전적 부담 앞에서 래리는 결국 뇌물을 주고 학부모를 통해 협박까지 한 학생의 학점을 고쳐준다.



전화벨이 울린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래리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었는데 그 엑스레이 결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니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오라는 전화다. 그냥 전화로 말해주면 안 되냐고 하는데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지금 당장 오는 건 어떠냐고 한다. 그렇다면 가벼운/좋은 결과는 아닐 거 같다.



그리고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은 래리의 아들 장면이다. 래리의 아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이 들어와서 뭐라고 말을 하더니 학교가 급히 파한다. 아마 재난 경보 때문에 급히 귀가 조치를 시킨 것 같다. 바람이 엄청나고 저 멀리서 뭔가가 다가온다. 토네이도? 학교가 급히 파할 정도면 아마 가벼운 일은 아닌 거 같다. 아들은 가만히 그걸 쳐다보고 있다. 지금 그럴 때인가?



영화 이후의 래리의 삶은 더욱더 곤란해졌을 것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 같고, 아들은 마약에 빠져 지내고 있고. 테뉴어 심사를 통과하긴 했지만 그는 이제 명백하게 학생에게 뇌물을 받고 성적을 고쳐준 사람이 되었고. 사이(싸이)의 죽음으로 아내와의 이혼은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번엔 래리가 이웃집 여자와 외도를 했으므로. 심지어 여기 언급한 것만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나는 래리의 형제나 딸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곤란한 상황이 올 것이 당연히 예상되는 과정을 지나와놓고, 진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도 운이 없다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다며 랍비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말할 것인가?


남들이 serious man이라고 말하는 사이(싸이)가 진짜로 serious man이라고 착각한 그이니 어쩔 수 없을 것 같긴 하다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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