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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송곳니 (2009)

너무 무섭고 가짜 같지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

by 육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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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니01.jpg 송곳니 Dogtooth, Kynodontas, 2009

랍스터로 유명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09년 작품. 랍스터도 이 작품도 극본, 감독 모두 요르고스 란티모스 작이기에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지는 정서와 장면들이 있기는 한데... 상대적으로 최신작이었던 랍스터는 그나마 순한 맛이 된 거였구나. 송곳니는 진짜 매운맛이다. 정서적으로나 그냥 대놓고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어디서든 영화 정보를 검색하면 나오는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도시 근교 한 저택에 아이들 세 명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킨 채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 그들은 바깥세상과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아버지만이 외부로 나갈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가끔 회사 경비인 크리스티나를 들이고, 마당에 나타난 고양이는 무서운 침입자로 교육한다. 이들의 등장과 자그마한 틈새 사이로 순종적이기만 했던 큰딸은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아버지.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가던 큰딸은 충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활자로 요약된 내용부터 뭔가 징그러운 게 느껴진다. 그걸 알고 봤음에도 상상 이상이었다. 나도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비위가 약하다면 보기 힘들 듯. 혹은 보더라도 중도 하차할 가능성이 높다.

'비위가 약하다'고 했는데 사실 그조차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폭력 장면을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동물 학대 장면을 더 괴로워하고. 그렇게 다르기 마련인데... 그 다를 법한 비위들을 빼놓지 않고 건드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영화인 거 같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들 '너무 갔다'는 이유로. (나도 동의는 한다)

나도 뭐 폭력 장면, 동물 학대, 근친상간 이런 장면들 다 보기 괴로워하는 약한 비위를 가졌지만... 그런 장면들은 사실 순간이다. 순간 눈 좀 가리고, 눈 좀 작게 뜨고... 이렇게 넘어가면 넘어가지는 장면들.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영화 내내 볼 수밖에 없는 멍하고 멍청한 자녀들의 표정이었다. 진짜 행복한 웃음 따위 볼 수 없는, 멍하고 멍청한 표정과 경악할 만한 발언들. 그렇다고 자녀들이 정말 뭘 모를 수도 있는 어린 나이도 아니다. 이들은 대충 봐도 최소 17세 전후는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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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같은 묘사의 잔인함과 별개로 내가 경악했던 장면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매가 대화한다. "엄마 또 방에서 혼잣말해. 엄마 혼잣말할 때 좀 무섭지 않아?"라고 키득거린다. 엄마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엄마는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자녀들은 전화기라는 존재를 모르니 문을 닫고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을 보고 '혼잣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밖에 나가려면 자동차를 타고 나가야만 한다고 세뇌해 놨기 때문에, 대문 앞 1m 정도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오지 못하는 아들. 그리고 그 세계관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인지 아버지는 집 앞 1m 정도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오기 위해서 본인도 차를 타고 나갔다가 들어온다.

저택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세 남매가 비행기가 여기에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떨어지면 내 거라고. 눈에 보이는 그 크기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근감이나 비행기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그리고 부모는 그 잘못된 지식을 강화해 주기 위해 진짜 비행기가 하늘 위를 날아갔을 때 그렇게 보이는(그 정도로 느껴지는) 비행기 모형을 던져 자식들이 '떨어진 비행기를 갖게' 해준다.

단어의 뜻을 세뇌한다. 저택 안에서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이런 뜻이라고, 저런 뜻이라고 교육...이라기보다는 세뇌한다. 그리고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부모조차도. 엄마가 곧 개를 '낳을' 것이라고도 알려주고 아이들은 그걸 천진난만하게 믿는다.

아이들과 아내가 사용할 물건들을 사 오는 아빠는, 세상과의 접촉을 없게 하기 위해 마트에서 물건을 사 집에 오는 길에 잠시 멈춰 모든 물건의 포장지와 택을 제거한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도록. 또한 바깥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손수 옷을 찢고 습격당한 코스프레를 하기도 한다. 바깥은 위험하다. 나는 이 위험한 곳에서 너희들을 위해 일을 하고 물건을 구해온다,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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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놀이로는 비디오를 보자고 하는 장면. 비디오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세계를 담은 것일 텐데? 그 비디오는 본인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본인들을 찍은 모습을 본인들이 본다. 그리고 그 볼 거리를 만들기 위해 종종 비디오를 찍기도 한다. 어떤 멍청함의 악순환을 보는 기분이랄까.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은 오직 우리뿐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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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길고도 소름 끼쳤던 장면은 공허한 눈빛으로 춤을 추는 장면. 둘째 딸은 추다가 힘들다고 그만두지만 첫째 딸은 끝까지 춤을 춘다. 예쁘지만 예쁘지 않고 예뻐야 하는데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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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생각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 역시도 그러했지만, 북한은 어쨌든 나라라는 큰 단위이고 현대사회에서 통제가 힘들어지는 부분도 있을 테니(제한적으로나마 해외에 나가고 들어올 수 있다면 당연한 결과), 나는 사이비 종교 생각이 더 크게 났다. 좁은 세계 안에서 세뇌를 통해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

비논리로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은 세뇌와 공포(협박)와 폭력을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가정 단위이든 국가 단위이든 간에...

그렇다면 아버지란 작자는 왜 그랬을까? 그는 진심으로 세상이 더럽다고 믿어서 자식들을 지키려고 한 거 같긴 하다. 크리스티나(아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기 위해 들인 외부인)를 통해 큰 딸이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고, 외부의 비디오를 본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분노하여 큰 딸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고 크리스티나에게도 찾아가서 더 큰 폭력을 저지른다. 그러면서 말한다. 네 자식들은 너 닮아서 망나니가 되길 바란다고. 이걸 보면 진심으로 자녀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긴 하다.

그리고 아마 그는 자신이 저질러온 만행들을 스스로는 자식들을 향한 사랑이고 자신의 희생이고 노력이라고 생각했을 거 같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왜냐하면 자식 세 명 거느려봤자 대단한 권위를 얻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그가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도 그 믿음에 동의/동조했기에 시작된 육아 방식이었을 거고. (아내도 세뇌시켰을 수는 있을 거 같다) 그는 밖에서는 멀쩡하게 일도 하고 그 모든 집안 대소사에 관여하고 기억하고 통제하는 걸 보면 멍청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새삼스러운 생각 중에는 인간 아무리 잘나 봤자 1인분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으니 그렇게 실행했겠고, 그 세상 안에서는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무오류의 논리였겠지만, 그래봤자 그건 본인 판단인 것이다.

본인이 판단한 본인의 옳음이란 나를 찍은 비디오를 내가 보면서 여가시간을 보내는 수준으로 늪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꼭 북한이나 사이비 종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갖고 오지 않더라도, 작은 단위에서의 함정과 파국에도 적용할 수 있을 거 같다고도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큰 딸은 아빠의 차 트렁크에 숨어 들어가 저택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아버지는 그건 모른 채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간다. 바깥세상에서 주차된 차의 트렁크 안에 딸이 있을 것이다. 그 트렁크만을 비추다가 영화는 끝난다.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열린 결말 같지 않았다. 뭘 생각해도 해피엔딩은 없을 거라는 점에서.

아빠에게 빨리 발견되어도 끔찍하고 너무 늦게 발견되면 그대로 트렁크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설령 트렁크문을 열고 나온다 쳐도... 이미 짐승처럼 외계인처럼 자라온 그녀가 진짜 세상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보호받고 지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아버지란 작자가 가장 걱정하고 염려해 온 일들(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너무 빠르게 나쁜 물이 들거나)이 순식간에 벌어질 것이다.

저택에 남은 두 자녀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그들에게 어떤 해피엔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크리스티나가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었겠지. 물론 저택의 위치를 알지 못하도록 크리스티나의 눈을 가린 채 데려오고 데려가곤 했지만 이미 폭행까지 당한 크리스티나가 분노해서라도 저 집 이상하다,라고 세상에 폭로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크리스티나가 자녀들에게 세상을 알려줘서 분노한 아버지는 결국 크리스티나를 대체할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만 누굴 찾아야 세상의 오염된 것을 완전히 배제한 채 요구하는 것만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크리스티나의 역할은 아들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딸들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그걸 알려주기도 했고. 그래서 크리스티나가 없는 사이 그 남매들은 근친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결국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다는 의미가 되고, 그렇다면 그 견고하게 지어놓은 저택의 성은 언제까지나 굳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 세상의 한계일 것이고 그것만이 해피엔딩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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